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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트래킹/역사탐방

목숨 던져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낸 제주낭자 홍윤애의 가슴시린 사랑 이야기


조선 정조 때 제주에서는

춘향이보다 더 애절하고 목숨을 던져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낸

홍랑 홍윤애의 이야기가 있다.


오늘 그 홍윤애의 묘터를 찾아

가슴시린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먼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홍윤애와 조정철에 대해서 알고 가자.


조정철과 홍윤애는 누구?


조정철은 조선 명문가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이고

장인은 노론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였다.


장인이 정조시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조정철은 27세에 제주로 유배를 오게되고


부인 홍씨는 친정아버지로 인해 남편까지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된 자책감에 

자결을 하게된다.


홍랑 홍윤애는 고려말 정승을 지낸

홍언박의 후예이나 15세기 초 제주에 유배온 

홍윤강의 후손이다

몰락한 유망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


조정철은 정조 1년(1777년) 제주에 유배와서

외부와 일체 단절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고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 조정철의 인품을 흠모하던 홍윤애는

조정철의 처지가 안타까워 식사장만과

빨래 등 심부름을 자처하게 된다.


둘의 관계는 동경과 존중

그리고 은혜와 감사의 마음으로 맺어졌다.


이후 그들은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사무쳐

연인으로 발전하여 정조 5년(1781년) 2월

마침내 홍랑은 귀여운 딸을 분만하게 된다.


새로 부임한 목사는 집안의 철천지 원수


노론 4대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소론파 김시구

그가 제주 목사로 부임했다.


홍랑이 딸을 분만한지 한달 후이다.


김시구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철을 제거할 뜻으로 그의 죄상을 조사한다.


주변을 염탐하던 중 홍랑이 그의 적소를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를 관아로 잡아들인다.


목사가 근무했던 제주목관아의 현재 모습


고문, 그리고 죽음. 사랑을 지켜내다


김시구는 홍랑을 동헌 뜰 형틀에 묶어

조정철의 죄상을 자백 받아내기 위해

참혹한 고문을 가한다.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은 산모 홍랑은

곤장 70대를 맞고 살과 근육이 찢겨지고


출산후 자리잡지 못한 뼈는 몸속에서

우스러지니 세상의 어떤 고통이

이보다 더 하리오.


결국 홍랑은 형틀에 묶인 채

그렇게..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과 딸, 그리고 세상과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어사 파견과 진상조사


김시구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을

은폐하기 위해 도내에서 유배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어사 박천형을 내려보내어

조사하지만 아무런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시구는 파직되고

조정철은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 정의현과 추자도 등으로

이배되어 55세 까지 29년간

긴 귀향생활이 이어진다.


관직 복귀와 한 맺힌 제주 목사에 부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조정철은 1805년 귀양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재 등용된지 7년 만인

순조 11년(1811)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홍윤애의 무덤 앞에서 절절한 시 한편


제주 목사로 부임 후 조정철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홍랑의 무덤을 찾았고

그의 딸도 해후하였다.


그는 홍윤애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그녀에게 바치는 애절한 시를 새겨놓는다



옥 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지 몇해인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하여 돌아갔을까


진한 피 고이 간직하니

죽더라도 인연으로 남으리


전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고


일문에 높은 절기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한 떨기 꽃

글론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홍윤애의 무덤은 원래 지금의 전농로에 

있었으며 무덤터 푯말은 현재 전농로 LH공사

건너편 보도에 설치되어 있다.



무덤터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을 홍랑길이라

이름지어 그녀를 기리고 있다.



홍윤애 무덤은 1936년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되었다.


앞에 보이는 묘가 홍윤애의 묘이고

뒤에는 홍윤애의 외손자 박규팔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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