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주트래킹/역사탐방

제주4.3의 현장을 찾아서(3) - 영화 "지슬" 촬영지 동광리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1편에서는 해방이후부터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까지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2편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인 협상에서부터 초강경진압으로써 초토화작전을 벌이게 된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1편-해방부터 4.3봉기까지 역사적배경 다시보기

2편-평화협상 결렬과 초토화작전 다시보기


세번째 이야기부터는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한 초토화작전을 펼치면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번 이야기는 영화 "지슬"의 스토리 배경인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피해사례이다.


동광리사무소에 도착해서 4.3길을 걸으면 맨 먼저 임문숙 일가의 헛묘를 볼수 있다.

헛묘는 숨어있거나 한라산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힌 마을사람들이 정방폭포에서 집단 학살 당해서 그 시신을 찾지 못해 유골을 묻지 못하고 묘만 있다고 해서 헛묘라고 한다.


바로 옆에서 가족과 이웃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느꼈을 가슴이 찢어질듯한 괴로움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살아있는게 오히려 더한 고통이었을 그당시의 상황이 머리속을 스쳐가면서 내 가슴도 울컹해지면서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1. 4.3 이전의 동광리 상황


4.3 당시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호), 조수궤(10여호), 사장밧(3호), 간장리(10여호), 삼밧구석(마전동, 46호) 등 5개의 자연부락이 있던 중산간 농촌마을이었다.


동광리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관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던 마을이다. 

4.3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미군정의 곡물 수집정책에 반대하여 곡물수매를 독려하던 관리를 폭행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실형을 받았고 주모자들을 잡기 위해 수시로 경찰이 드나들면서 많은 청년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남아있는 주민은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마을주민들은 동광리의 4.3은 미군정의 보리공출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2. 동광리 학살의 신호탄 무등이왓


△무등이왓 최초 학살터-무등이왓은 당시 130여호의 주민이 살았으며 동광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15일 새벽,

군 토벌대가 동광리를 포위한 채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 시켰다.

당시 동광리 주민들은 중산간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상태로 대부분 마을에 남아있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 후 주민 10여명을 무등이왓 우영밧에서 총살했다.

이 사건은 계엄공포(11월17일)  이전에 발생한 동광리 초토화 작전과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잠복학살터-현재는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집이 불타고 사람들이 학살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으로 숨어들었다.

마을 부근에 숨어있던 주민 20여명이 12월11일 토벌대에게 붙잡혀 학살되었으며 다음날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가족 10여명(여성,노인,어린아이들)이 잠복 중이던 토벌대에게 붙잡혀 잇달아 집단학살 당하기도 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에나 씀직한 잠복작전을 여성, 노인등을 대상으로 작전을 펴서 학살하다니 실로 어처구니 없고, 작전이 성공했다며 좋아 했을 저들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 살아남은 주민들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쳐야만 했다.


3. 삼밧구석마을에도 학살은 비껴가지 않았다


△삼밧구석마을 입구-지금은 승마장으로 변해 있다.


삼밧구석마을은 46호에 150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하던 마을로 동광리에서 2번째 큰 마을이었다.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하여 삼밧, 또는 마전동이라고도 불려졌으며 4.3의 광풍은 이 평화로운 마을도 비껴가지 않았다.

이 마을도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에 전소되고 5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 당했다.


△임씨올레-올레는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작은 골목을 말한다


삼밧구석마을은 임씨 집성촌이었다.

임씨 5가구 살던 집터 올레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사람은 지나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

이 곳에 살던 임문숙씨 일가 5명을 비롯해 14명이 학살 당했다.


마을의 중심에는 퐁낭(팽나무)이 있고 그 당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4. 최후 삶의 보루, 큰넓궤 동굴에서의 생활


영화 "지슬"의 촬영지 큰넓궤 가는 길 입구이다.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목장 안에 곶자왈 지대에 있는 용암동굴로 11월15일 동광리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행된 이후 마을 인근에 숨어 사는 생활을 하다가 발각되어 무자비하게 학살되는 일이 잦아지자 도너리오름 곶자왈에 숨어서 지내다 큰넓궤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입구에서 약 1.3km, 30분 정도 걸으면 큰넓궤가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나무 뒤에 가려져 있는 큰넓궤

지금은 안전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입구는 어른 한사람이 배를 바닥에 대고 포복하듯이 기어 들어가야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좁은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 현무암 그대로의 울퉁불퉁한 바닥을 지나 들어가면 2~3m 떨어지는 절벽이 나오고 이 곳을 내려서면 넓은 장소가 나온다.


그 해에는 유난히도 폭설이 많이 내렸다.

동굴 안은 매서운 추위와 토벌대의 수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으로써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굴 속에 숨어살던 120명 정도의 사람들 중에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굴속에서 생활하고 일부 젊은 청장년들은 대나무로 만든 창을 가지고 주변 야산이나 근처 작은 굴에 숨어 있으면서 토벌대의 습격에 대비하여 망을 보거나 식량과 물등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동굴 속에서 발견된 생활의 흔적들


이렇게 그들은 60일 정도 암흑천치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던 중 토벌대에게 굴의 위치가 발각되고 만다.

주민들은 이불과 솜들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놓고 불을 붙여 토벌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토벌대는 일단 굴입구를 돌로 막은 후 철수하였다.


토벌대가 떠난 후 망을 보던 젊은이들이 돌들을 치워 주민들은 눈속을 뚫고 100여명은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게 총살되거나 정방폭포로 끌려가 사살 후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다.


볼레오름으로 가지 못한 일부 주민들은 도노미오름 동쪽에 일본군이 파놓은 굴, 또는 미오름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게 잡혀 사살되었다.


△큰넓궤에서 곶자왈 지대를 지나 100여m 정도 더 들어가면 도엣궤라는 동굴이 나오며 이 곳에서도 피신 생활을 하였다.


도엣궤에서 나오는 곶자왈 지대이다.

아무도 없고 나혼자뿐이라 약간은 무섭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무고한 양민들의 울부짖음이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5. 마을 재건


4.3으로 인해 동광리를 이루던 5개의 자연부락은 거의 전소되다시피 하였고 가축들조차 보이지 않는 마을로 남아 있었다.

1956년경부터는 4.3 진압 과정에서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당시 10여 가구가 살던 간장동을 중심으로 마을 재건이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을 하여왔다.


다른 마을들은 아직까지도 잃어버린 마을로 불려지며 아픈 역사를 잊지않으려는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봥옵써 카카오스토리 소식받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