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첫번째 이야기 - 역사적 배경


▲ 1948년 10월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 중산간 마을은 불타고 주민들은 해안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한다. 이는 4.3 피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민 25,000~30,000명이 희생된 제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8만명)

이 사건은 그동안 언급을 금기시하다가 1990년대에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2000년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4.3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정치,사회 시대적 상황을 먼저 이해하여야만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부터 4.3이 종료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몇 편으로 나누어서 이 곳에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당시 현장을 직접 찾아가 현재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지도 함께 기록에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에서 정의


1. 해방과 인민위원회 설립


ㅇ인민위원회 설립

36년간의 일제 통치에서 해방되자 여운형 등이 주도하여 우리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설립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어 치안유지와 건국할동에 매진한다.

1945년 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가 결성되고 이 조직들은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된다.


ㅇ제주도 인민위원회 결성

제주도의 건준지부는 1945년 9월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성되었다 초기에는 미군정과 협력하며 읍.면.리 단위까지 도 전체 조직으로 커졌고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했다.

항일투쟁 활동가들이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친일세력을 제외한 좌우익 모두가 참여해 세력이 강했으면서도 온건한 정책을 추구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 제주도 인민위원회 옛터로 중앙로 중심가 사거리에 위치해 있고 현재는 천년타워 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2. 신탁통치와 친일 경찰 재등용


ㅇ미군정과 친일 경찰.관료 재등용

11월9일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상륙하여 군정업무를 추진하면서 초기에 역점을 두었던 분야는 치안유지와 재산관리였다.

그런데 일제 식민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과 관리를 재등용해 민심을 자극하였다.


ㅇ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지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부 장관이 만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나라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였는데 최고 5년간 미국,영국,소련,중국이 신탁통지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자주독립을 갈망하던 우리국민들은 좌와 우를 막론하여 거세게 반발하였다.


3. 4.3의 도화선 3.1 발포사건 발발


ㅇ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대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길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주도 민전은 자주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1947년 3.1일 대대적인 3.1절 기념대회를 개최하였다.

기념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대략 25천~3만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제28회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던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민중가수 최상돈님이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며 해방의 노래 "만세"를 부르고 있다.


ㅇ가두시위와 경찰의 발포

기념대회가 끝난 후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다.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날 즈음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말굽에 치인 어린이를 그대로 둔채 가버리자 주변 사람들이 야유를 하며 돌멩이를 던지고 기마경관을 쫓아 갔다.

군중에 쫓긴 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는데 그 순간 총성이 울린다.

이 발포로 인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총상을 입고 이 사건은 이후 제주에 엄청난 희생을 몰고온 4.3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 당시의 기마경찰 - 일제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이 미군정에 의해 재등용되어 제주도민들의 원성을 샀다.


ㅇ3.10 총파업으로 항의

경찰 발포에 항의하여 1947년 3월10일부터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은 제주도청으로부터 시작해 각 관공서 및 금융기관, 학교로까지 번졌고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 66명까지 파업에 동참하여 166개 기관, 41,211명이 파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4.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무차별 연행


ㅇ미군정의 조사단 파견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여 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은 남로당 제주 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 또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했다.

거기다가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한다


ㅇ응원 경찰 급파와 대대적 검거

조사가 끝난 후 3월14일 조병옥 경무부장과 경찰 421명이 급파되었다.(당시 제주경찰은 330명)

조병옥은 15일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려 이틀새 200명이 연행되고 이들에 대한 고문이 시작된다,

3.1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가 2,500명에 이른다.



5. 극우청년단 "서청" 제주에 들어오다


ㅇ서북청년회란

북한에서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청년단체로 미군정은 서청의 극우적 성향을 이용해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지역에 이들을 투입했는데 봉급없는 경찰 보조기능을 하면서 갈취와 폭행을 일삼아 주민들로 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


▲ 서북청년회 집회


ㅇ빨갱이 척결을 구실로 갖은 만행 

제주도가 붉은섬으로 지목되면서 서청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행정기관,교육기관등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초에는 서청단원이 760명에 이르렀고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미명 아래 주민들을 연행하고 고문하여 제주를 공포와 분노의 소용돌이로 몰고가 민심을 자극시켰으며 결국 이들의 악행도 4.3사건이 발생하게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는 1947년 11월2일 조일구락부에서 결성되었다 - 중앙로 사거리에서 칠성로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 칠성로 내 제주신보사 옛터로 ROGATIS 뒷편 초록색 양철로 만든 제주신보사 옛 건물의 형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제주신보는 해방이후 제주도의 유일한 언론매체로 4.3발발 이후 제주읍내에 배포된 전단지가 빌미되어 서청단원들이 사장과 편집국장 등에게 집단폭행을 가하고 제주신보사를 강제 접수하여 7개월간 변칙 발행했다. 이후 편집국장 김호진은 군수사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1948년 10월에 처형되었다. 1990년 "제주신보"의 일부가 발굴되어 4.3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하였다.


6. "탄압이면 항쟁" 무장봉기 발발


ㅇ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다

1948년4월3일 새벽 2시경 오름 정상에 붉게 타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하여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와 경찰, 서북청년회 단원의 숙소를 등을 공격하는 무장봉기가 벌어졌다.


ㅇ봉기의 명분

무장대는 봉기의 명분으로 크게 두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는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저항과 둘째는 5.10 총선거를 한달정도 남겨둔 시점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에 반대해 조국의 통일 독립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ㅇ무장대의 실체

무장대는 초기 350명이었고 4.3 전 기간을 통틀어도 500명을 넘지 못했다.

4.3 봉기 당시 무장대가 소유한 무기는 일제 99식 총 27정과 권총 3정, 수류탄 25발이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토벌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으나 토벌대는 진압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하였고 또한 무장대는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 중국 팔로군 출신이며 심지어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언론에 왜곡 발언을 하였다.


이상으로 해방 이후부터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발생하기 까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았다.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평화적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과 강경 진압하기 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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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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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리스. 2019.01.09 2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4.3사건에 대해 티브에서 본 적 있는데
    정말 가슴아픈 비극적인 사건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것 같더라구요..
    역사적인 배경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2. 라미드니오니 2019.01.09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는 역사가 판단을 해주겠지만 지금처럼 4.3사건으로 명명하며
    잘잘못 따지지 않고 모두 안타까운 역사였다라고
    일단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3. 휴식같은 친구 2019.01.09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는 정부에 위협이나 정치적인 이용이 된다면 사람 목숨이 파리나 마찬가지였던 시절입니다.
    늦게나마 진상조사 확실히 해서 억울한 죽음의 영령이라도 달래줘야합니다.

  4. 담덕01 2019.01.09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도에서 사시는건가요?
    4.3 사건이 최근에 더 많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 같더라고요.
    제발 슬픈 역사의 반복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5. *저녁노을* 2019.01.10 06: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의 아픔이지요.

    잘 보고 가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6. 공수래공수거 2019.01.10 0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슬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주 가서 관련 현장을 보면 그냥 지나칠수 없더군요..

  7. Patrick30 2019.01.10 0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대학교 다닐때 4.3의 후예라고 제 후배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남성들이 많이 변을 당해서 남자가 귀하다고 하더라구요 ..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

  8. 싸나이^^ 2019.01.10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탄압을 겪고도 동족끼리...
    안타깝고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제주도는 한번씩 가곤 하는데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곳이 많아 맘이...

  9. 버블프라이스 2019.01.10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 아픈 기억입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요즘 감기가 독하다고 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길 바래요 강봥옵써님 ^_^

  10. 소스킹 2019.01.10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에 다녀오셨네요..
    덕분에 가슴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갑니다.

  11. peterjun 2019.01.10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3 이야기를 예전에 자세하게 볼 기회가 있었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너무나도 안타까워 한동안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들..... 입니다.

  12. 귀요미디지 2019.01.11 1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 아픈 과거사네요...
    지금의 행복에 대해 감사하며 사는 하루를 보내야 할거 같아요
    오늘도 즐거운 금요일되세요 ^^

  13. 청결원 2019.01.11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14. Deborah 2019.01.12 0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네요. 잊지 말아야할 역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