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1편에서는 해방이후부터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까지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2편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인 협상에서부터 초강경진압으로써 초토화작전을 벌이게 된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1편-해방부터 4.3봉기까지 역사적배경 다시보기

2편-평화협상 결렬과 초토화작전 다시보기


세번째 이야기부터는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한 초토화작전을 펼치면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번 이야기는 영화 "지슬"의 스토리 배경인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피해사례이다.


동광리사무소에 도착해서 4.3길을 걸으면 맨 먼저 임문숙 일가의 헛묘를 볼수 있다.

헛묘는 숨어있거나 한라산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힌 마을사람들이 정방폭포에서 집단 학살 당해서 그 시신을 찾지 못해 유골을 묻지 못하고 묘만 있다고 해서 헛묘라고 한다.


바로 옆에서 가족과 이웃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느꼈을 가슴이 찢어질듯한 괴로움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살아있는게 오히려 더한 고통이었을 그당시의 상황이 머리속을 스쳐가면서 내 가슴도 울컹해지면서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1. 4.3 이전의 동광리 상황


4.3 당시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호), 조수궤(10여호), 사장밧(3호), 간장리(10여호), 삼밧구석(마전동, 46호) 등 5개의 자연부락이 있던 중산간 농촌마을이었다.


동광리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관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던 마을이다. 

4.3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미군정의 곡물 수집정책에 반대하여 곡물수매를 독려하던 관리를 폭행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실형을 받았고 주모자들을 잡기 위해 수시로 경찰이 드나들면서 많은 청년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남아있는 주민은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마을주민들은 동광리의 4.3은 미군정의 보리공출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2. 동광리 학살의 신호탄 무등이왓


△무등이왓 최초 학살터-무등이왓은 당시 130여호의 주민이 살았으며 동광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15일 새벽,

군 토벌대가 동광리를 포위한 채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 시켰다.

당시 동광리 주민들은 중산간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상태로 대부분 마을에 남아있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 후 주민 10여명을 무등이왓 우영밧에서 총살했다.

이 사건은 계엄공포(11월17일)  이전에 발생한 동광리 초토화 작전과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잠복학살터-현재는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집이 불타고 사람들이 학살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으로 숨어들었다.

마을 부근에 숨어있던 주민 20여명이 12월11일 토벌대에게 붙잡혀 학살되었으며 다음날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가족 10여명(여성,노인,어린아이들)이 잠복 중이던 토벌대에게 붙잡혀 잇달아 집단학살 당하기도 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에나 씀직한 잠복작전을 여성, 노인등을 대상으로 작전을 펴서 학살하다니 실로 어처구니 없고, 작전이 성공했다며 좋아 했을 저들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 살아남은 주민들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쳐야만 했다.


3. 삼밧구석마을에도 학살은 비껴가지 않았다


△삼밧구석마을 입구-지금은 승마장으로 변해 있다.


삼밧구석마을은 46호에 150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하던 마을로 동광리에서 2번째 큰 마을이었다.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하여 삼밧, 또는 마전동이라고도 불려졌으며 4.3의 광풍은 이 평화로운 마을도 비껴가지 않았다.

이 마을도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에 전소되고 5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 당했다.


△임씨올레-올레는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작은 골목을 말한다


삼밧구석마을은 임씨 집성촌이었다.

임씨 5가구 살던 집터 올레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사람은 지나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

이 곳에 살던 임문숙씨 일가 5명을 비롯해 14명이 학살 당했다.


마을의 중심에는 퐁낭(팽나무)이 있고 그 당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4. 최후 삶의 보루, 큰넓궤 동굴에서의 생활


영화 "지슬"의 촬영지 큰넓궤 가는 길 입구이다.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목장 안에 곶자왈 지대에 있는 용암동굴로 11월15일 동광리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행된 이후 마을 인근에 숨어 사는 생활을 하다가 발각되어 무자비하게 학살되는 일이 잦아지자 도너리오름 곶자왈에 숨어서 지내다 큰넓궤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입구에서 약 1.3km, 30분 정도 걸으면 큰넓궤가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나무 뒤에 가려져 있는 큰넓궤

지금은 안전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입구는 어른 한사람이 배를 바닥에 대고 포복하듯이 기어 들어가야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좁은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 현무암 그대로의 울퉁불퉁한 바닥을 지나 들어가면 2~3m 떨어지는 절벽이 나오고 이 곳을 내려서면 넓은 장소가 나온다.


그 해에는 유난히도 폭설이 많이 내렸다.

동굴 안은 매서운 추위와 토벌대의 수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으로써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굴 속에 숨어살던 120명 정도의 사람들 중에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굴속에서 생활하고 일부 젊은 청장년들은 대나무로 만든 창을 가지고 주변 야산이나 근처 작은 굴에 숨어 있으면서 토벌대의 습격에 대비하여 망을 보거나 식량과 물등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동굴 속에서 발견된 생활의 흔적들


이렇게 그들은 60일 정도 암흑천치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던 중 토벌대에게 굴의 위치가 발각되고 만다.

주민들은 이불과 솜들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놓고 불을 붙여 토벌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토벌대는 일단 굴입구를 돌로 막은 후 철수하였다.


토벌대가 떠난 후 망을 보던 젊은이들이 돌들을 치워 주민들은 눈속을 뚫고 100여명은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게 총살되거나 정방폭포로 끌려가 사살 후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다.


볼레오름으로 가지 못한 일부 주민들은 도노미오름 동쪽에 일본군이 파놓은 굴, 또는 미오름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게 잡혀 사살되었다.


△큰넓궤에서 곶자왈 지대를 지나 100여m 정도 더 들어가면 도엣궤라는 동굴이 나오며 이 곳에서도 피신 생활을 하였다.


도엣궤에서 나오는 곶자왈 지대이다.

아무도 없고 나혼자뿐이라 약간은 무섭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무고한 양민들의 울부짖음이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5. 마을 재건


4.3으로 인해 동광리를 이루던 5개의 자연부락은 거의 전소되다시피 하였고 가축들조차 보이지 않는 마을로 남아 있었다.

1956년경부터는 4.3 진압 과정에서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당시 10여 가구가 살던 간장동을 중심으로 마을 재건이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을 하여왔다.


다른 마을들은 아직까지도 잃어버린 마을로 불려지며 아픈 역사를 잊지않으려는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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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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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공수래공수거 2019.02.25 0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슬 영화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잊어서는 안될 역사입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칮고 싶습니다

    이번주 제주가는데 이번에는 못 들를것 같군요..ㅎ

    • 강봥옵써 2019.03.01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화 지슬을 보셨군요
      4.3은 잊어서는 안되는 아픈 역사입니다
      예전에는 잘 모르고 지내왔는데 4.3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포스팅 할려고 합니다

  3. 휴식같은 친구 2019.02.25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이군요.
    안타깝습니다.
    다시는 그런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어요.

  4. 버블프라이스 2019.02.25 0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 "지슬" 촬영지 동광리에 다녀오셨었군요?
    아픈 역사를 담고 있어서 정말 잊지 말아야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잘보고 갑니다.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바래요

  5. 문moon 2019.02.25 1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대체 왜 토벌대들이 주민을 학살 하였을까요?
    한국전쟁이 일어난때도 아니고 일제시대도 아니데요..
    가슴아픈 일들 입니다.

    • 강봥옵써 2019.03.01 0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군정은 한반도의 빠른 안정을 위해 행정경험이 많은 일제시대 관료들이 필요했고
      또 그들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해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아야하기 때문에 5.10 선거를 무효로 만든 제주도민 대부분을 빨갱이로 몰아간 겁니다.

  6. Patrick30 2019.02.25 1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잊지 말아야할 아픈 역사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번주도 행복하세 보내세요 ^^

  7. 애리놀다~♡ 2019.02.25 1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무섭고 끔찍한 시대였어요. ㅠㅠ
    아직도 아픔과 한이 서려있는 듯 하구요.
    현재의 재건된 마을을 보는 것만으로도 짠하네요.

  8. 한태연 2019.02.25 1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포스팅이네요 ㅎㅎ 잘보고갑니다.

  9. 꿍스뿡이 2019.02.25 15: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차이나는클래스라는 프로를 통해 제주 4.3에 대해 들었습니다.

    강의형식으로만 듣고, 장소는 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보니 그때 제가 들었던 강의 내용이 생각이 납니다.

  10. 청결원 2019.02.26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11. kangdante 2019.02.26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역사도 있는 것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

  12. 미.야 2019.02.26 1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도에 이런 일들이 또 있었군요..ㅠㅠ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요 모르는 부분들이 많네요

  13. 소스킹 2019.02.26 14: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포스팅 덕분에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 )

  14. Laddie 2019.02.26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동굴안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요

    • 강봥옵써 2019.03.01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굴은 배를 바닥에 대고 기어 들어가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고 동굴 속은 그야말로 암흑 천지였을겁니다.
      이런 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60일을 숨어 살았다니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요

  15. 코리아배낭여행 2019.02.28 0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이네요.
    공감 꾹 누르고 다녀갑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16. 절대강자! 2019.02.28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도 아픈역사가 있었다는 게 너무나 슬퍼집니다.
    영화 지슬은 보지 못했지만, 덕분에 동광리에 대해서 잘 알고 갑니다. 꾹.

  17. @산들바람 2019.02.28 14: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온해보이는 아틈다운 마을이
    가슴아픈 과거를지니고 있네요
    자세한 소개. 잘보고갑니다.

  18. 작은흐름 2019.02.28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쩐지 슬퍼지는 풍경입니다ㅜㅜ 덕분에 꼭 알아야할 내용 잘 보고 갑니다!

  19. 글쓰는 엔지니어 2019.03.01 0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아픈 과거가 있는 곳이네요 ㅠㅠ 잘보구가요!!

  20. 뫼올랑 2019.04.08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의 슬픈역사 4.3 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장이네요..ㅠㅠ
    좀 더 보완해서 마음으로 더 깊이 다가갈수 있도록 문화시설이 있음 좋겠네요...
    제주시 서귀포시 대도시에만 만들지말고 ...
    현장에서 듣고 보고 느끼수있는 ..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두번째 이야기 - 평화협상에서 초토화까지


첫번째 이야기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4.3 봉기까지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군정이 시작되고 일제에 부역하던 기존 경찰과 관료는 재등용되고 서북청년회의 만행등으로 도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3.1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3.10 총파업이 발생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무차별 연행과 고문으로 제주 사회는 분노 그자체, 결국은 이에 항거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남로당을 주축으로 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하게 된다.


해방부터 4.3봉기까지 역사적배경 다시보기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4.3 봉기가 일어난 후 제주도 경비대와 무장대와의 평화협정이 극적으로 타결되었으나 강경진압으로 돌아서게된 과정과 해안선 5km 이상 소개령 등 초토화 작전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평화협상 주도한 9연대장 김익렬 중령


▲ 1948년 5월5일 진압대책을 논하기 위해 제주에 모인 군경 최고 수뇌부  

- 왼쪽 두번째 미군정장관 딘장군, 맨우측은 김익렬연대장, 그 옆이 조병옥경무부장


ㅇ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주도가 道로 승격되면서 향토연대인 조선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1946년 11월 모슬포에서 창설되었다.

다음해 3월부터 제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전라도 청년들을 대상으로 모병하여 4.3 직전에는 인원이 800명에 달하였다.

초대 연대장에는 장창국 부위가 발령되고 1947년 9월 김익렬 부연대장(소령)이 부임하여 1948년 2월에 연대장(중령)으로 승진하였다.


ㅇ평화협정 체결 그러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인 김익렬 중령은 군대는 외적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하는 곳이지 치안문제에 관여하는 기관이 아니라며 처음에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딘 미군정장관은 4월17일 "항복을 유도하라"며 명령을 내려 4월28일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인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다.

4.28 평화협정 주요내용

① 72시간 이내 전투 중지 ② 약속위반시 즉각 전투 재개 ③ 무장해재 및 하산 후 신변보장


2.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 결렬


ㅇ방화사건 전모

오라리에는 4.3봉기 이후 무장대와 경찰로부터 각각 죽임을 당하는 인명사건이 몇차례 발생했다.

사건 당일인 5월 1일 오전 9시에는 전날 무장대로부터 살해된 대청단원의 부인의 장례식에 경찰과 서청.대청단원 30여명이 참석하였다. 장례식에서 나온 후 경찰은 돌아가고 청년단원들은 남아 오라리 마을에 진입하여 좌파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5가구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이들이 마을을 벗어날 즈음 무장대 20여명이 방화를 저지른 청년들을 추격하고 이 소식을 접한 경찰 트럭 2대가 출현했을때 무장대는 마을을 이미 떠나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불붙은 마을을 진화하고 있었는데 경찰들이 마을 어귀서부터 총을 쏘며 진격해오며 이 와중에 마을주민 고무생이란 여인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ㅇ제주도 메이데이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은 미군이 공중과 지상에서 입체 촬영한 소위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기록 영화에 생생히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발적 사건이라면 미리 준비해 놓듯이 이렇게 생생하게 입체촬영이 가능했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미묘하고 복잡한 사건이 뒤얽혀 일어난 오라리 연미마을 방화사건은 제주 4.3사건 전개 과정에서 미군정 당국이 강경진압 작전을 전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 제주도 메이데이 영상 - 항공에서 촬영한 불타는 오라리 마을


3. 김익렬 중령의 해임과 5.10선거 보이콧


ㅇ김익렬 중령 전출

오라리 방화사건을 조사한 제9연대는 보수 청년단체의 소행이라는 조사결과를 보고하였으나 미군은 경찰의 보고와 다르다며 이를 묵살하고 강경진압 명령을 내린다.

5월5일 군경수뇌부 9명이 모인 진압대책 비밀회의에서 김익렬 중령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사태 원인 및 해결책을 놓고 대립을 하다 몸싸움까지 벌이게 된다.

이를 계기로 5월 6일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중령을 전격 해임하고 9연대장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을 임명한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을 계획된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한 반면 김익렬 중령은 입산자들이 늘어난 것은 경찰의 실책때문이며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고 무력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조병옥과 몸싸움.


ㅇ제주도는 5.10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

무장대는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냈다.

선거 당일 마을에는 경찰가족이나 우익 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소수를 제외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산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나서야 마을로 돌아왔다

1948년 5월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선거 결과 유일하게 제주도에서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2개 선거구에서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2개 선거구에 대해 재투표를 명했으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재선거가 무기한 연기되고 제주도는 5.10 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 투표를 거부해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 


4.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


ㅇ미군 토벌작전 진두 지휘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 선거가 무산되자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통솔토록 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며 강경 진압작전을 본격화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ㅇ박진경 연대장 피살

김익렬 중령의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작전을 벌여 6주간 4,000명을 체포하며 이에 대해 미군정은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하며 제주에 부임한지 한달 남짓한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킨다.

그러나 1948년 6월 18일 진급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의 총에 맞아 피살된다.

이 암살 사건에 연루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다.


ㅇ무차별 학살극 초토화작전 감행

9연대장으로 새로 부임한 송요찬은 1948년 10월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km이외의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11월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작전이 본격화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제주 4.3 사건등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라" 명령했을뿐만 아니라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였고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켰다.


▲ 이승만대통령의 계엄문서


이렇게 하여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중산간마을에 토벌대가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림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이 자행된다.


세번째 이야기부터는 초토화작전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현장을 찾아 그날의 참상들을 조사하고 기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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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moon 2019.01.20 1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안타까운 제주의 역사네요.
    이런 마음 아픈 일이 없으면 좋겠네요.
    좋은 주말 되세요 ~^^

  2. 휴식같은 친구 2019.01.20 1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였네요.난세의 영웅인 김익렬 중장은 칭찬받아 마땅하네요.
    이제 진상을 밝히고 실추된 명예를 살리면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3. 버블프라이스 2019.01.20 16: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주제의 글 잘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제주 역사이군요.. 몰랐던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고 갑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강봥옵써님

  4. 생명마루 신림점 2019.01.20 16: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내용의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5. peterjun 2019.01.20 2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김익렬 중령은 훗날 4.3에 대한 진실을 담은 유고를 내셨군요.
    글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됩니다.

  6. 공수래공수거 2019.01.21 06: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 4.3 사건의 이야기가 더 많은분들에게 진실되게
    알려졌으면 합니다.

    • 강봥옵써 2019.01.22 1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에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였지만 지금은 국가에서도 공인된 추념일로 지정되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7. Patrick30 2019.01.21 0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잊으면 안되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안타까울 따름이죠..

  8. 절대강자! 2019.01.21 09: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의 4.3항쟁은 정말 아픈 역사인듯 합니다.
    이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겠지요... 좋은 정보를 잘 읽고 갑니다.

  9. 귀요미디지 2019.01.21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제주 역사에 대한 많이 나오더라구요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거 같아요
    진실된 역사를 많은 분들에게 알려졌음 하네요.
    좋은 내용 잘보고 가요~

  10. 2019.01.21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청결원 2019.01.21 15: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주 시작 잘 하세요~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12. Chatterer 2019.01.21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마음이 아파오네요..
    먹먹해지네요 6.25를 지가가고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 되었는데
    절대 그런곳이 아니었네요
    제주도도 슬픔을 많이 간직한 가슴아픈 지역이었네요
    그들의 이권 그 이권을 잡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사람을 아픔으로 만들었다는게 너무 밉네요
    자세히 더 알아 보고 싶어지는 내용이네요
    사실 다른사람들은 이 문제를 잘 모르는거 같긴해요
    저도 그랬었구요 ㅠㅠ
    갑자기 광주사태에 대해 잘못알고 말하는 사람들이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이것도 다른사람들이 알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드네요
    그리고 또한 멋지네요 선거를 거부할정도로
    깨어있는 멋진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오늘도 하나 배워가네요
    공감꾹~~ 다른것도 꾹~~~ 눌러드리고 다녀 갑니다

    • 강봥옵써 2019.01.22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10년 전만 해도 4.3 이 뭔지도 관심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4.3유족회에서 진행하는 4.3 순례행사에 참여해서 해설하시는 분의 해설을 듣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어요.
      바로 우리 아버지 시대, 할아버지 시대의 그리 멀지도 않은 시절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는데...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가져볼려고 4.3에 대해 공부하면서 차근히 기록해볼려고 합니다.
      피해 봤던 동네에 직접 찾아다니면서 그때의 상황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자 하니까 앞으로 3편..4편 계속 기대해주세요

  13. Laddie 2019.01.21 2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입니다
    잘 배워갑니다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첫번째 이야기 - 역사적 배경


▲ 1948년 10월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 중산간 마을은 불타고 주민들은 해안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한다. 이는 4.3 피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민 25,000~30,000명이 희생된 제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8만명)

이 사건은 그동안 언급을 금기시하다가 1990년대에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2000년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4.3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정치,사회 시대적 상황을 먼저 이해하여야만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부터 4.3이 종료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몇 편으로 나누어서 이 곳에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당시 현장을 직접 찾아가 현재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지도 함께 기록에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에서 정의


1. 해방과 인민위원회 설립


ㅇ인민위원회 설립

36년간의 일제 통치에서 해방되자 여운형 등이 주도하여 우리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설립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어 치안유지와 건국할동에 매진한다.

1945년 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가 결성되고 이 조직들은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된다.


ㅇ제주도 인민위원회 결성

제주도의 건준지부는 1945년 9월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성되었다 초기에는 미군정과 협력하며 읍.면.리 단위까지 도 전체 조직으로 커졌고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했다.

항일투쟁 활동가들이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친일세력을 제외한 좌우익 모두가 참여해 세력이 강했으면서도 온건한 정책을 추구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 제주도 인민위원회 옛터로 중앙로 중심가 사거리에 위치해 있고 현재는 천년타워 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2. 신탁통치와 친일 경찰 재등용


ㅇ미군정과 친일 경찰.관료 재등용

11월9일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상륙하여 군정업무를 추진하면서 초기에 역점을 두었던 분야는 치안유지와 재산관리였다.

그런데 일제 식민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과 관리를 재등용해 민심을 자극하였다.


ㅇ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지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부 장관이 만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나라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였는데 최고 5년간 미국,영국,소련,중국이 신탁통지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자주독립을 갈망하던 우리국민들은 좌와 우를 막론하여 거세게 반발하였다.


3. 4.3의 도화선 3.1 발포사건 발발


ㅇ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대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길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주도 민전은 자주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1947년 3.1일 대대적인 3.1절 기념대회를 개최하였다.

기념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대략 25천~3만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제28회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던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민중가수 최상돈님이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며 해방의 노래 "만세"를 부르고 있다.


ㅇ가두시위와 경찰의 발포

기념대회가 끝난 후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다.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날 즈음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말굽에 치인 어린이를 그대로 둔채 가버리자 주변 사람들이 야유를 하며 돌멩이를 던지고 기마경관을 쫓아 갔다.

군중에 쫓긴 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는데 그 순간 총성이 울린다.

이 발포로 인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총상을 입고 이 사건은 이후 제주에 엄청난 희생을 몰고온 4.3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 당시의 기마경찰 - 일제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이 미군정에 의해 재등용되어 제주도민들의 원성을 샀다.


ㅇ3.10 총파업으로 항의

경찰 발포에 항의하여 1947년 3월10일부터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은 제주도청으로부터 시작해 각 관공서 및 금융기관, 학교로까지 번졌고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 66명까지 파업에 동참하여 166개 기관, 41,211명이 파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4.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무차별 연행


ㅇ미군정의 조사단 파견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여 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은 남로당 제주 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 또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했다.

거기다가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한다


ㅇ응원 경찰 급파와 대대적 검거

조사가 끝난 후 3월14일 조병옥 경무부장과 경찰 421명이 급파되었다.(당시 제주경찰은 330명)

조병옥은 15일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려 이틀새 200명이 연행되고 이들에 대한 고문이 시작된다,

3.1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가 2,500명에 이른다.



5. 극우청년단 "서청" 제주에 들어오다


ㅇ서북청년회란

북한에서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청년단체로 미군정은 서청의 극우적 성향을 이용해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지역에 이들을 투입했는데 봉급없는 경찰 보조기능을 하면서 갈취와 폭행을 일삼아 주민들로 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


▲ 서북청년회 집회


ㅇ빨갱이 척결을 구실로 갖은 만행 

제주도가 붉은섬으로 지목되면서 서청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행정기관,교육기관등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초에는 서청단원이 760명에 이르렀고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미명 아래 주민들을 연행하고 고문하여 제주를 공포와 분노의 소용돌이로 몰고가 민심을 자극시켰으며 결국 이들의 악행도 4.3사건이 발생하게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는 1947년 11월2일 조일구락부에서 결성되었다 - 중앙로 사거리에서 칠성로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 칠성로 내 제주신보사 옛터로 ROGATIS 뒷편 초록색 양철로 만든 제주신보사 옛 건물의 형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제주신보는 해방이후 제주도의 유일한 언론매체로 4.3발발 이후 제주읍내에 배포된 전단지가 빌미되어 서청단원들이 사장과 편집국장 등에게 집단폭행을 가하고 제주신보사를 강제 접수하여 7개월간 변칙 발행했다. 이후 편집국장 김호진은 군수사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1948년 10월에 처형되었다. 1990년 "제주신보"의 일부가 발굴되어 4.3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하였다.


6. "탄압이면 항쟁" 무장봉기 발발


ㅇ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다

1948년4월3일 새벽 2시경 오름 정상에 붉게 타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하여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와 경찰, 서북청년회 단원의 숙소를 등을 공격하는 무장봉기가 벌어졌다.


ㅇ봉기의 명분

무장대는 봉기의 명분으로 크게 두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는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저항과 둘째는 5.10 총선거를 한달정도 남겨둔 시점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에 반대해 조국의 통일 독립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ㅇ무장대의 실체

무장대는 초기 350명이었고 4.3 전 기간을 통틀어도 500명을 넘지 못했다.

4.3 봉기 당시 무장대가 소유한 무기는 일제 99식 총 27정과 권총 3정, 수류탄 25발이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토벌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으나 토벌대는 진압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하였고 또한 무장대는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 중국 팔로군 출신이며 심지어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언론에 왜곡 발언을 하였다.


이상으로 해방 이후부터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발생하기 까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았다.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평화적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과 강경 진압하기 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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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리스. 2019.01.09 2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4.3사건에 대해 티브에서 본 적 있는데
    정말 가슴아픈 비극적인 사건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것 같더라구요..
    역사적인 배경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2. 라미드니오니 2019.01.09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는 역사가 판단을 해주겠지만 지금처럼 4.3사건으로 명명하며
    잘잘못 따지지 않고 모두 안타까운 역사였다라고
    일단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3. 휴식같은 친구 2019.01.09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는 정부에 위협이나 정치적인 이용이 된다면 사람 목숨이 파리나 마찬가지였던 시절입니다.
    늦게나마 진상조사 확실히 해서 억울한 죽음의 영령이라도 달래줘야합니다.

  4. 담덕01 2019.01.09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도에서 사시는건가요?
    4.3 사건이 최근에 더 많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 같더라고요.
    제발 슬픈 역사의 반복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5. *저녁노을* 2019.01.10 06: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의 아픔이지요.

    잘 보고 가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6. 공수래공수거 2019.01.10 0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슬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주 가서 관련 현장을 보면 그냥 지나칠수 없더군요..

  7. Patrick30 2019.01.10 0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대학교 다닐때 4.3의 후예라고 제 후배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남성들이 많이 변을 당해서 남자가 귀하다고 하더라구요 ..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

  8. 싸나이^^ 2019.01.10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탄압을 겪고도 동족끼리...
    안타깝고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제주도는 한번씩 가곤 하는데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곳이 많아 맘이...

  9. 버블프라이스 2019.01.10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 아픈 기억입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요즘 감기가 독하다고 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길 바래요 강봥옵써님 ^_^

  10. 소스킹 2019.01.10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에 다녀오셨네요..
    덕분에 가슴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갑니다.

  11. peterjun 2019.01.10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3 이야기를 예전에 자세하게 볼 기회가 있었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너무나도 안타까워 한동안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들..... 입니다.

  12. 귀요미디지 2019.01.11 1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 아픈 과거사네요...
    지금의 행복에 대해 감사하며 사는 하루를 보내야 할거 같아요
    오늘도 즐거운 금요일되세요 ^^

  13. 청결원 2019.01.11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14. Deborah 2019.01.12 0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네요. 잊지 말아야할 역사네요.


조선 정조 때 제주에서는

춘향이보다 더 애절하고 목숨을 던져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낸

홍랑 홍윤애의 이야기가 있다.


오늘 그 홍윤애의 묘터를 찾아

가슴시린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먼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홍윤애와 조정철에 대해서 알고 가자.


조정철과 홍윤애는 누구?


조정철은 조선 명문가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이고

장인은 노론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였다.


장인이 정조시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조정철은 27세에 제주로 유배를 오게되고


부인 홍씨는 친정아버지로 인해 남편까지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된 자책감에 

자결을 하게된다.


홍랑 홍윤애는 고려말 정승을 지낸

홍언박의 후예이나 15세기 초 제주에 유배온 

홍윤강의 후손이다

몰락한 유망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


조정철은 정조 1년(1777년) 제주에 유배와서

외부와 일체 단절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고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 조정철의 인품을 흠모하던 홍윤애는

조정철의 처지가 안타까워 식사장만과

빨래 등 심부름을 자처하게 된다.


둘의 관계는 동경과 존중

그리고 은혜와 감사의 마음으로 맺어졌다.


이후 그들은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사무쳐

연인으로 발전하여 정조 5년(1781년) 2월

마침내 홍랑은 귀여운 딸을 분만하게 된다.


새로 부임한 목사는 집안의 철천지 원수


노론 4대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소론파 김시구

그가 제주 목사로 부임했다.


홍랑이 딸을 분만한지 한달 후이다.


김시구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철을 제거할 뜻으로 그의 죄상을 조사한다.


주변을 염탐하던 중 홍랑이 그의 적소를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를 관아로 잡아들인다.


목사가 근무했던 제주목관아의 현재 모습


고문, 그리고 죽음. 사랑을 지켜내다


김시구는 홍랑을 동헌 뜰 형틀에 묶어

조정철의 죄상을 자백 받아내기 위해

참혹한 고문을 가한다.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은 산모 홍랑은

곤장 70대를 맞고 살과 근육이 찢겨지고


출산후 자리잡지 못한 뼈는 몸속에서

우스러지니 세상의 어떤 고통이

이보다 더 하리오.


결국 홍랑은 형틀에 묶인 채

그렇게..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과 딸, 그리고 세상과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어사 파견과 진상조사


김시구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을

은폐하기 위해 도내에서 유배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어사 박천형을 내려보내어

조사하지만 아무런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시구는 파직되고

조정철은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 정의현과 추자도 등으로

이배되어 55세 까지 29년간

긴 귀향생활이 이어진다.


관직 복귀와 한 맺힌 제주 목사에 부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조정철은 1805년 귀양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재 등용된지 7년 만인

순조 11년(1811)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홍윤애의 무덤 앞에서 절절한 시 한편


제주 목사로 부임 후 조정철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홍랑의 무덤을 찾았고

그의 딸도 해후하였다.


그는 홍윤애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그녀에게 바치는 애절한 시를 새겨놓는다



옥 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지 몇해인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하여 돌아갔을까


진한 피 고이 간직하니

죽더라도 인연으로 남으리


전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고


일문에 높은 절기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한 떨기 꽃

글론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홍윤애의 무덤은 원래 지금의 전농로에 

있었으며 무덤터 푯말은 현재 전농로 LH공사

건너편 보도에 설치되어 있다.



무덤터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을 홍랑길이라

이름지어 그녀를 기리고 있다.



홍윤애 무덤은 1936년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되었다.


앞에 보이는 묘가 홍윤애의 묘이고

뒤에는 홍윤애의 외손자 박규팔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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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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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절대강자! 2019.01.04 1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정철과 홍윤애의 이야기... 실화였었군요...
    홍윤애의 무덤... 언제나 그렇듯이 제주는 가보고 싶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2. 작은흐름 2019.01.04 16: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절절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로군요! 제주도 가게 되면 한번 가보고 싶네요!

  3. Deborah 2019.01.04 2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애절한 사랑이야기네요. 김시구라는 제주 목사가 참 원망스럽군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무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으니 말이죠.

  4. 버블프라이스 2019.01.05 02: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정철과 홍윤애 이야기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애절한 사랑이야기네요- 덕분에 잘보고 갑니다.

  5. 청결원 2019.01.05 0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6. *저녁노을* 2019.01.05 1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뜻한 사랑이야기네요.

    잘 보고 가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7. 잉여토기 2019.01.07 0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목숨바쳐 지켜낸 사랑 이야기네요.
    목사까지 부임했지만 그시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얼마나 애통하고 분하였을까요.

  8. 공수래공수거 2019.01.07 0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정철과 홍윤애 .가슴아픈 이야기 덕분에 잘 알고 갑니다.
    제주 방문시 흔적을 보게 되면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한주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9. peterjun 2019.01.07 2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랑을 지키며 죽어간 홍윤애.
    그녀의 이야기가 참 아프네요. ㅠㅠ

  10. 유시상 2019.01.12 1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 여 초로 회합부다시.인생은 풀입에 맺힌 이슬과 같아서 다시 만나기 어렵다 (연산군).

  11. 소스킹 2019.01.21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네요.
    그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 받고 갑니다.
    후에 딸과 다시 만났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 강봥옵써 2019.01.22 1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춘향전은 해피앤딩이지만 홍윤애 얘기는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비극으로 끝났네요
      그래도 조정철이 나중에 잘되어서 무덤도 새로 잘보살펴주니까 하늘나라에서 둘이 만나 행복하게 잘살고 있겠죠

4.3이 웬만큼 진정국면에 들어섰다고 여겼는데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다시 한번 민심이 흉흉해지고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설마 이 곳까지는 별일 없겠지 하며 맘 한편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7월 무더웠던 여름밤 늦은 시간 

갑자기 들이닥친 모슬포경찰서에서 나온 순경들에 의해 이상숙의 남편은 연행되어 갔다.


1945년 해방되던 해 만20세의 나이에 안덕초등학교 교사인 1살 연하 남편에게 시집온지 5년..

워낙에 혼란스런 시기에 제대로 신혼의 단꿈에 젖어보지도 못하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채 남편은 그렇게 끌려갔다.

전쟁후 6월부터 7월까지 예비검속이란 미명하에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이렇게 구인된 인원만 344명이었다.


※ 예비검속

6.25전쟁이 발발하자 치안국장의 명으로 각경찰서에 불순분자 검거의 명이 하달되어 공무원,유지, 지식인 및 사상이 불순하다고 판단되거나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사상이 의심이 될만한 인물들을 강제 구금하여 그 경중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A, B, C, D 등급으로 구분하여 제주도 주둔 해병대 계엄사령부에 이관하였다.


△예비검속에 의해 연행된 인원은 모슬포 절간 창고와 한림 수협창고 및 무릉지서에서 분산 수용하였다.


이상숙은 다음날 수소문 끝에 남편이 모슬포 절간 창고에 구금되어 있는 걸 알게 되고 장농에서 옷가지 등을 챙겨 면회를 가게된다.


※ 검속 초기에는 경찰의 감호하에 가족의 면회를 허용하고 유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또 한편으로는 경찰 자의적 판단에 따라 4개 등급으로 분류하며 살생부를 작성하였다.


매일 밤을 불안과 남편 걱정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던 중

8월20일(음력 7월7석) 새벽 2시경 

누군가 집으로 달려와 구금되었던 사람들을 트럭에 태우고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다고 알려준다.

불안한 낌새에 이상숙은 달빛마저 깜깜한 밤길을 맨발로 거리로 뛰쳐 나간다.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어두운 밤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발바닥은 이미 다 까진 상태이지만

아랑곳 않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매다가

알뜨르 비행장 인근에서 끌려간 사람들이 흘린 듯한 고무신을 발견한다.


△ 트럭에 끌려가던 사람들은 죽음을 예견하고 신고 있던 고무신을 길거리에 버려 가는 길을 가족에게 알리려 했다.


고무신을 손에 들고 알뜨르비행장 인근을 헤매던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성..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 앉았다.

잠시후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는게 보인다.

알뜨르 비행장 안에 위치한 섯알오름

일제시대 제주 최대 탄약창고가 있다가 일본 패망후 미군에 의해 폭파된 곳이다.


△ 영화 "지슬"의 한장면


숨가삐 달려온 길 

담요,배게,옷가지 등이 타오르고 있다.

희생자들의 소지품이다.


오름 안쪽에 처참히 뒤엉켜 있는 수많은 시신들

면회때 갈아입으라고 건냈던 옷을 입은 남편의 시신을 한번에 알아볼수 있었다.

시신을 거두어 갈려는 순간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남편이 처참하게 다른 시신과 뒤엉켜 죽어있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시신도 거두지도 못하는 20대 젊은 아낙의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후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경비가 강화되어 유족들의 접근을 불허하였다.


이상숙은 남편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기회를 보며 맴돌던 차 6개월이 지난 이듬해 2월 새벽

경비군이 나오기 전에 남편의 시신을 발굴하여 상창리 소유 밭에 안장한다.


찢겨진 가슴안고 살아온 긴세월

이제 만 92세의 할머니가 된 그녀는 비참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예비검속 희생 67주기를 맞아 45백만원을 기부하여 그날의 사건을 담은 영구불망의 돌을 이곳 섯알오름에 세운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섯알오름 사건기록비에 새겨진 이상숙 할머니의 이야기에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 본 저자의 상상을 추가하여 작성한 글로 사실과 일부 다를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집단학살과 암매장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워지자 정부의 최종 피난처를 제주도로 잠정 결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모슬포 주둔 해병대 계엄사령부에 명하여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사상이 불순한 자들을 재판없이 불법 처형하였다. 

※ 예비검속에 의한 면별 희생자수
   ㅇ한림(68명) 한경(64명) 대정(58명) 안덕(33명) 애월(6명) 제주시(1명) 서귀포시(5명) 기타(17명) 합계(252명)


△ 앞쪽 웅덩이는 백조일손 유해 149구 발굴, 뒷쪽은 만뱅디묘역 유해 62구 발굴


△ 백조일손지묘 위령비


이후 유족들의 꾸준한 탄원으로 6년이 지난 1956년 149구의 시신을 발굴하여

자타 식별이 되지 않는  132구에 대해서는 대정읍 상모리586-1번지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지라 명명하였고 1959년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이후 1961년 경찰 주도하에 묘역 위령비는 파괴되고 경찰의 강요로 23위는 타소로 이장되었다

유족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93년 백조일손 유족회가 창립되어 같은 해 위령비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 백조일손지묘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의 시신은 6년이 지난 1956년에 수습할 수 있었는데 132구의 시신이 구별되지 않아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묘라 하였다


△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섯알오름)


섯알오름 길 

                           /김경훈 시인


트럭에 실려 가는 길

살아 다시 못 오네


살붙이 피붙이 뼈붙이 고향마을은

돌아보면 볼수록 더 멀어지고


죽어 멸치젓 담듯 담가져

살아 다시 못 가네


이정표 되어 길 따라 흩어진 고무신들

전설처럼 사록 전하네


오늘은 칠석날

갈라진 반도 물 막은 섬 귀퉁이 섯알오름


하늘과 땅, 저승과 이승 다리 놓아

미리내 길 위로  산 자 죽은 자 만나네


녹은 살 식은 피 흩어진 뼈

온전히 새 숨결로 살아 다시 만나네


△ 알뜨르 비행장 내 섯알오름 앞 제주 비엔날레에 전시된 김해곤의 작품 "한 알"이 보인다.

 

제주의 또 하나의 아픈 역사 알뜨르비행장

이곳은 중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이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군사 기지였다. 

일제에 의해 희생된 아픈 영혼이 아직도 떠돌고 있을것 같은 알뜨르 그 안 섯알오름에서 이번에는 같은 동족 또는 국가 권력에 의해 생긴 아픔이어서 그 아픔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 아픈 역사의 땅 넓은 평야 위에 지금은 밭작물이 풍요롭게 자라나 있지만 유족과 도민들의 아픔과 상처는 언제 치유될까?

김해곤의 작품 "한 알"은 알뜨르비행장이 지니고 있는 전쟁의 역사가 치유되고 이 곳에 새로운 한 알의 생명이 잉태되어 평화의 시작을 알린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일제시대 알뜨르 비행장 전투기 격납고 20곳 중 19곳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전쟁에 미친 일제의 전투기 저장고

격납고 앞에 하얗게 피어있는 감자꽃

척박한 땅에서도 잘자라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민중과 동거동락했던 감자,

시골에 어머니와 누님을 연상케하는 감자꽃

그래서 이쁘게 피면 필수록

더욱더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제주어로는 "지슬" 

제주 4.3 영화의 소재로 썻던 바로 그 지슬이다.

 

감자꽃

                    /권태웅

 

자주 꽃 핀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 제주 비엔날레 알뜨르 비행장에 전시된 조각가 최평곤의 작품

 

2017년 9월2일 ~ 12월3일 알뜨르비행장 섯알오름 입구에서는

아픈 역사의 사실을 재조명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2017 제주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있는 자는 더더욱 말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아픔을 명확히 진단하고 치유하여 미래에는 이같은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조각가 최평곤은 파랑새를 손에 든 소녀를 통해서 평화의 메세지를 우리 모두에게 전한다.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와 상생으로

 

이 땅에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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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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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10.16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잊어서는 안될 역사 입니다.
    마지막 사진 '제주 비엔날레 알뜨르 비행장에 전시된 조각가 최평곤의 작품' 의 메세지 처럼
    현재 북한 핵문제로 전세계가 떠들석 한데요-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와 상생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래요-

  2. 고성돈 2017.10.16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광희 글 잘썸쩌.
    작가해도 되클.

  3. Deborah 2017.10.17 0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이 아프네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는 ..ㅜㅜㅠㅠ 전쟁은 없어야해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4. peterjun 2017.10.17 0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네요.
    이런 아픈 역사적 사실들을 접하면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인간의 잔인함이 이런식으로 표현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ㅠㅠ

    • 강봥옵써 2017.10.22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슴 아픈 제주의 역사입니다.
      그동안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빨리 4.3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희생자들이 명예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5. *저녁노을* 2017.10.17 0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의 아픈 역사이지요.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않는...

    잘 보고갑니다.

    행복한 화요일 되세요^^

  6. 공수래공수거 2017.10.17 0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슬 영화를 봤습니다
    그 현장이로군요
    정말 아픈 역사이고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번주 태풍땜에 망설여집니다

    • 강봥옵써 2017.10.22 1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의 현장감을 살릴려고 지슬영화 한장면을 인용했고요...
      지슬영화 배경은 이곳이 아니라 조천읍의 북촌리입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7. 한화호텔앤드리조트 2017.10.17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픈 역사가 땅 곳곳에 녹아있는 섯알오름이네요. 놀거리 가득한 여행지의 이미지가 강렬하지만, 분명 잊지 말아야 할 민족의 눈물이 서린 곳이라는걸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갑니다. 제주 하늘 아래 덩그러니 놓인 조형물들이 인상적이네요. 희망 가득한 메세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사진 잘 보고 가요, 쌀쌀해지는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8. 문moon 2017.10.17 1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 아픈 일과 유족의 한이 서린 곳이네요.
    읽어가며 괜히 마음이 헛헛해서.. ㅎ

  9. 청결원 2017.10.18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마음이 아픈 역사입니다..

  10. 여행하고 사진찍는 오로라공주 2017.10.18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제주도 섯알오름에 그런 가슴아픈 역사가 있는지 몰랐어요.ㅠㅠ 아..정말...잊혀져서는 안되고 오래 오래 기억하고 새겨야 겟네요

    • 강봥옵써 2017.10.22 1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픈 역사를 재조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아픔을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쉽게 이야기를 못꺼냈던 제주도민의 아픔입니다

  11. 귀여운걸 2017.10.20 2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으로 마음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로군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이 평화가 지속되었으면 좋겠어요..

날씨 화창한 봄의 끝자락에

가시리 갑마장길을 찾았다.

고교 동창과 가족, 그리고 은사님들..

벌써 16회째 행해지는 추억의 원보훈련


가시리 정석항공관 옆 주차장에 하차.

작은사슴이오름과 큰사슴이오름이 보인다.


큰사슴이오름 탐방로 입구에서 출발

첫번째 고지인 큰사슴이오름..

저 오름을 먼저 넘어야 한다.


아직까지는 평탄한 길

엉겅퀴 3송이..

꽃만 생각하며 찍었는데 벌 한마리가...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 이연실의 노래 "찔레꽃" 중에서 =


오르막 길이 상당히 가파른 편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다들 힘들어 하고 있다


큰사슴이오름 정상에서 잠깐 휴식 중

 

조선시대 제주말을 키우던 산마장

그 중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이 앞에 보이는

녹산장이라는 곳이다.

최고 등급의 말을 갑마라고 불렀는데

정조 때 녹산장을 갑마장으로 지정하여

감독관을 파견, 말의 관리상태등을 순찰하였다.

공마제도는 고종 32년에 폐지되었다.


갑마 사육장 터에 조성된 산책코스가 갑마장길

쫄븐 갑마장길은 오름 2개 포함 10.5km 거리로

약 3시간30분 정도 소요되는 코스이다.
 

이제 내려가는 길.....

정상은 땀 한번 닦고 물한잔 마시고

그렇게 잠시 머물렀다 비워줘야 하는 길

내리막엔 더 넓고 더 아름다운 풍경을

비워진 가슴으로 품어야 한다.


숲터널을 지날 때도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말고

한번씩은 내 발 바로 아래도 바라보자
 

청미래덩굴 줄기 부분...

제주도 말로는 명개라고 하는 백합과 식물이다.

윗부분을 꺽어서 먹으니 상당히 부드러웠다.

 

친구놈은 벌써 이만큼 꺾어서 자랑한다.

삶아서 비빔밥해 먹으면 최고라고~

 

이게 뭘까?

곤포 사일리지(Bale Silage)라고 한다.

수분량이 많은 목초, 사료작물을 진공으로

저장 및 발효하는 것이다.

※ 곤포 : 건초와 짚등을 운반과 저장이 편리하게

            둥글게 또는 사각으로 압축하는 것.

 

이제 다시 따라비오름 쪽으로 가야한다.

 

세종때 축조된 잣성길

축조 당시 원형을 대부분 잘 보존하고 있다.


오름의여왕이라 불리우는 따라비오름

가을철 억새꽃이 피었을 때 경치가 장관이다.

 

이 곳의 바람은 웰빙바람...

지금은 돈을 벌어다주는 바람이 되었다.


편백나무 숲길도 지난다.

이날 하루중 가장 시원했던 순간이었나?


승마를 즐기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 곳에 나와서 승마할려면

기본은 지나서 꽤 실력이 있는 멤버들이다.


아까 큰사슴이오름보다는 수월한 길이다.
 

어느덧 80초반이 되신 두분 선생님..

우리도 힘들어한 길을 뒤처지지 않고

긴 행군 길을 따라 걸어 오셨다.

건강하신 모습, 앞으로 더 건강하셨으면..

벤치에 각자 앉아 걸어오신 길을

바라보고 계시는 걸까?

지금 순간은 시간이 멈춰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라산을 받드는 듯한 풍차들의 모습

그리고 바람에 흔들거리는 바로 눈앞의 삘기

제주도 사투리로는 삥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껌 대용으로 질겅질겅 씹던 풀.


가시천 탐방로도 건너야 하고

바닥이 안좋은 길을 걸을려면

하체가 튼튼해야.....

오늘 이 길을 걸은 사람은 모두 튼튼한 걸로..


드디어 결승점 도착...

도착한 곳은 조랑말 체험공원

더운 날씨에 힘든 행군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은사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걸을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제 빈 속을 채우러 식당으로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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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7.06.13 05: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함께 따라 걷고 갑니다.
    ㅎㅎ
    즐거운 하루 되세요

  2. 청결원 2017.06.13 0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걷고 싶은 길이네요

  3. 친절한엠군 2017.06.13 07: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ㅎ 경치가 죽이는곳이지 말입니다ㅎㅎ

  4. 공수래공수거 2017.06.13 0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만 보면 제주에 언제 또 가지?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바다면 바다,오름이면 오름 멋진곳입니다

    • 강봥옵써 2017.06.18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수래님도 제주 많이 오셨쟌아요.
      똑 같은 곳을 가더라도 갈때마다 느낌이 다른 곳이 제주더라고요.
      계절, 날씨, 시간에 따라 다 다르니까요

  5. 코리아배낭여행 2017.06.13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자에 앉아서 잠시 휴식하며 즐기는 풍경 넘 부럽습니다.

  6. 양정석 2017.06.13 1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시간이었겠네요^^

  7. peterjun 2017.06.13 1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쩐지 마음이 평화로워지면서 짠~한 느낌이 드는 글이었어요.
    이번 포스팅을 너무 '시'적으로 적어주셔서... ^^
    좋은 시간 보내셨네요.

  8. GeniusJW 2017.06.13 2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는 카메라 앵글을 두는 곳이 작품이네요~~ㅎㅎ
    멋진 풍경들 사진에 감탄하고 갑니다~

  9. 버블프라이스 2017.06.14 0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치도 좋고, 승마사진까지 모두 멋지네요*

  10. 베짱이 2017.06.15 0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을 보니 예전에
    올레길 가다가 아무런 장구도 없는 말을 만지러 덩쿨을 헤치고 들어갔던 기억인 나네요. ㅋㅋ

  11. 절대강자! 2017.06.16 1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의 풍광에 눈이 시린듯 합니다.
    평화로운경치...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