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은 사진교실에서 출사를 나간다

오늘의 출사지는 한라생태숲

한라생태숲은 5.16도로 변 해발 600m 고지에 있으며 마소의 방목지로 사용했던 곳을 제주 식물의 보고에 걸맞게 생태복원 시킨 생태숲이다.

 

오늘 날씨는 맑고 뭉게구름이 떠 있는 청초하고 따사로운 봄날씨이다.

꽃놀이하기에 최적의 날씨인듯..

오늘 내가 봤던 꽃들에 대해 공부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포스팅해 보고자 한다.

 

▲산철쭉

진달래과에 속하며 전국 1600m 이하의 고지에 분포되어 있고 4월, 5월에 개화한다

한라산에는 5월초부터 6월중순까지 피어 있으며 특히 5월말에 가장 만개하는 시기로 주로 이 시기에 한라산 철쭉제가 열린다.

꽃말은 "사랑의 기쁨"으로 연인과 함께 손을 잡아주며 한라산 철쭉꽃밭을 걸으면 그 자체가 사랑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참꽃나무

진달래나 철쭉꽃에 비해 꽃이 크고 높게 자라서 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진달래꽃이라 하여 참꽃나무라 부른다.

제주도 한라산에 분포하며 5월에서 6월 중순까지 붉은색의 깔대기 모양으로 꽃이 핀다.

 

▲마가목

장미과에 속하며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한대수목으로 높은 산 중턱에서부터 꼭대기 능선에 낙옆 활엽수림을 구성하는 식물이다.

꽃은 5월~7월에 피며 10월에 열리는 빨간 열매와 단풍잎이 특히 일품이다.

열매는 약용으로 이용하고 줄기로 지팡이를 만든다.

 

 

▲수련

6월~7월에 피며 중부지방 이남의 연못에 기르는 수생식물이다.

해가 뜨면 꽃잎을 열고 흐리거나 해가 지면 꽃을 오므려서 잠자는 연꽃이라 하여 수련의 수는 물 가 아니라 잠잘 이다.

꽃말은 "당신의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오늘은 수련꽃 같은 아내에게 또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의 믿음을 보여줘야겠어요

 

▲노랑꽃창포

얕은 물가에 자라는 정수성식물이다.

꽃은 5월~6월 노란색으로 피어 연못 등에 관상용으로 심던 것이 하천이나 습지에 야생으로 자라기도 한다.

중금속 제거와 영양염류 제거 기능이 있으므로 수질정화식물로 이용할 수도 있다.

꽃말은 "우아한 마음" "당신을 믿는다"

 

▲금새우난초

새우처럼 마디가 있고 노란색의 꽃을 피우기 때문에 금새우난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울릉도와 안면도, 제주도를 비롯하여 남해 여러 도서지역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따뜻하고 비옥한 숲속의 배수가 잘되며 직사광선을 직접 받지않고 공중습도가 높은 지역에 살고 있다.

관상용으로 많이 채취되어 현재 자생지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 국제협약으로 보호하고 있는 식물로 특히 새로운 품종 등의 개발로 고가의 금새우난초 품종들이 역수입되고 있는 실정이 안타깝다.

 

▲자란

남부지방이나 섬지역에 분포하며 햇볕이 잘들고 약간 건조한 곳에서 생육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진도 북서해안에 약 10만평 정도의 대군락을 이루고 있다

얼핏보기에 새우난과 비슷하며 홍자색의 꽃을 피우는데서 자란이라 부르며 꽃이 아름다워 채취가 심해 자생지 및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 자생지 보호가 필요해 보인다.

 

▲붓꽃

산과 들에 양지 바른 곳의 습기가 많은 곳이나 메마른 땅에서도 자란다.

꽃은 5월~6월에 자주색으로 피고 흰꽃잎에 노란색무늬가 있는 것은 노랑무늬붓꽃이다.

봉우리일 때는 붓을 닮았지만 점차 꽃이 열리면서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특히 꽃잎은 안쪽에 노란색과 검은 자색의 선이 있어 매우 아름다운데 이 곳이 곤충을 유인하는 장치이다.

꿀이 없지만 곤충이 날아들도록 하여 8~9월 경에 열매가 결실된다.

붓꽃의 속명은 "아이리스"인데 그리이스 신화에서 붓꽃의 유래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상 5월에 한라산생태숲에서 만났던 꽃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해보았다.

꽃이나 나무 등 식물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해볼려고 하는데 참 어려울 것 같다.

숲과 나무 그리고 꽃, 자연속의 생명체 하나하나의 소중함과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예전과는 다르게 좀더 자주 보고 좀더 자세히 관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감상하며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풀 꽃

         -- 나 태 주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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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용눈이오름

오늘 겨우내 누워 있던 용이 잠에서 깨어나

  푸른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다


겨울을 마감하는 2월의 마지막 주

화창한 날에 용눈이오름을 찾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억새풀

몽땅 먹어버릴 기새로 오름 중턱까지 올라

왕성한 식욕을 가진 말들이 흩어져

각자의 영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김영갑 작가님을 제주에 정착하게 만든..

작가님을 수백번씩 오르게 한

그 용눈이오름을 나도 오늘 올라본다.


세개의 봉우리 사이에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타원형 분화구

그 속에는 새 봄의 따스함과 

생명의 기운이 담겨져 있어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두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굴곡진 곡선

작가님은 저 곡선에 매료되어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오름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셨나보다.


엄마의 품속과도 같은 포근함

그가 꿈꾸었던 이어도는 

엄마의 품속에서 잠들며 꿈꾸는 

편안한 표정의 아가의 모습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상의 세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

그 정상을 향해 사람들이 가쁜 숨을 쉬면서도

모두가 행복해하는 모습이다.


4.3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다랑쉬오름

잘룩한 허리 속에서 솟아나듯이

아픔을 딛고 새 생명의 탄생을 보는 듯하다


아무런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늘과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묘터를 쓴 것일까...


여럿이 함께 걸으면 더 즐겁고

힘든지 모르게 더 오래 걸을 수 있다.

혼자 걸으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생각하고

나를 보다 더 성숙하게 해준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

여전히 왕성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먹어치운 빈자리에는

새 생명이 돋아날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사라지기도 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도 하면서 변해가지만

우리는 변해가는 것에 무관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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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1편에서는 해방이후부터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까지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2편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인 협상에서부터 초강경진압으로써 초토화작전을 벌이게 된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1편-해방부터 4.3봉기까지 역사적배경 다시보기

2편-평화협상 결렬과 초토화작전 다시보기


세번째 이야기부터는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한 초토화작전을 펼치면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번 이야기는 영화 "지슬"의 스토리 배경인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피해사례이다.


동광리사무소에 도착해서 4.3길을 걸으면 맨 먼저 임문숙 일가의 헛묘를 볼수 있다.

헛묘는 숨어있거나 한라산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힌 마을사람들이 정방폭포에서 집단 학살 당해서 그 시신을 찾지 못해 유골을 묻지 못하고 묘만 있다고 해서 헛묘라고 한다.


바로 옆에서 가족과 이웃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느꼈을 가슴이 찢어질듯한 괴로움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살아있는게 오히려 더한 고통이었을 그당시의 상황이 머리속을 스쳐가면서 내 가슴도 울컹해지면서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1. 4.3 이전의 동광리 상황


4.3 당시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호), 조수궤(10여호), 사장밧(3호), 간장리(10여호), 삼밧구석(마전동, 46호) 등 5개의 자연부락이 있던 중산간 농촌마을이었다.


동광리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관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던 마을이다. 

4.3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미군정의 곡물 수집정책에 반대하여 곡물수매를 독려하던 관리를 폭행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실형을 받았고 주모자들을 잡기 위해 수시로 경찰이 드나들면서 많은 청년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남아있는 주민은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마을주민들은 동광리의 4.3은 미군정의 보리공출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2. 동광리 학살의 신호탄 무등이왓


△무등이왓 최초 학살터-무등이왓은 당시 130여호의 주민이 살았으며 동광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15일 새벽,

군 토벌대가 동광리를 포위한 채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 시켰다.

당시 동광리 주민들은 중산간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상태로 대부분 마을에 남아있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 후 주민 10여명을 무등이왓 우영밧에서 총살했다.

이 사건은 계엄공포(11월17일)  이전에 발생한 동광리 초토화 작전과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잠복학살터-현재는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집이 불타고 사람들이 학살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으로 숨어들었다.

마을 부근에 숨어있던 주민 20여명이 12월11일 토벌대에게 붙잡혀 학살되었으며 다음날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가족 10여명(여성,노인,어린아이들)이 잠복 중이던 토벌대에게 붙잡혀 잇달아 집단학살 당하기도 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에나 씀직한 잠복작전을 여성, 노인등을 대상으로 작전을 펴서 학살하다니 실로 어처구니 없고, 작전이 성공했다며 좋아 했을 저들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 살아남은 주민들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쳐야만 했다.


3. 삼밧구석마을에도 학살은 비껴가지 않았다


△삼밧구석마을 입구-지금은 승마장으로 변해 있다.


삼밧구석마을은 46호에 150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하던 마을로 동광리에서 2번째 큰 마을이었다.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하여 삼밧, 또는 마전동이라고도 불려졌으며 4.3의 광풍은 이 평화로운 마을도 비껴가지 않았다.

이 마을도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에 전소되고 5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 당했다.


△임씨올레-올레는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작은 골목을 말한다


삼밧구석마을은 임씨 집성촌이었다.

임씨 5가구 살던 집터 올레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사람은 지나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

이 곳에 살던 임문숙씨 일가 5명을 비롯해 14명이 학살 당했다.


마을의 중심에는 퐁낭(팽나무)이 있고 그 당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4. 최후 삶의 보루, 큰넓궤 동굴에서의 생활


영화 "지슬"의 촬영지 큰넓궤 가는 길 입구이다.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목장 안에 곶자왈 지대에 있는 용암동굴로 11월15일 동광리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행된 이후 마을 인근에 숨어 사는 생활을 하다가 발각되어 무자비하게 학살되는 일이 잦아지자 도너리오름 곶자왈에 숨어서 지내다 큰넓궤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입구에서 약 1.3km, 30분 정도 걸으면 큰넓궤가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나무 뒤에 가려져 있는 큰넓궤

지금은 안전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입구는 어른 한사람이 배를 바닥에 대고 포복하듯이 기어 들어가야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좁은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 현무암 그대로의 울퉁불퉁한 바닥을 지나 들어가면 2~3m 떨어지는 절벽이 나오고 이 곳을 내려서면 넓은 장소가 나온다.


그 해에는 유난히도 폭설이 많이 내렸다.

동굴 안은 매서운 추위와 토벌대의 수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으로써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굴 속에 숨어살던 120명 정도의 사람들 중에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굴속에서 생활하고 일부 젊은 청장년들은 대나무로 만든 창을 가지고 주변 야산이나 근처 작은 굴에 숨어 있으면서 토벌대의 습격에 대비하여 망을 보거나 식량과 물등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동굴 속에서 발견된 생활의 흔적들


이렇게 그들은 60일 정도 암흑천치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던 중 토벌대에게 굴의 위치가 발각되고 만다.

주민들은 이불과 솜들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놓고 불을 붙여 토벌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토벌대는 일단 굴입구를 돌로 막은 후 철수하였다.


토벌대가 떠난 후 망을 보던 젊은이들이 돌들을 치워 주민들은 눈속을 뚫고 100여명은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게 총살되거나 정방폭포로 끌려가 사살 후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다.


볼레오름으로 가지 못한 일부 주민들은 도노미오름 동쪽에 일본군이 파놓은 굴, 또는 미오름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게 잡혀 사살되었다.


△큰넓궤에서 곶자왈 지대를 지나 100여m 정도 더 들어가면 도엣궤라는 동굴이 나오며 이 곳에서도 피신 생활을 하였다.


도엣궤에서 나오는 곶자왈 지대이다.

아무도 없고 나혼자뿐이라 약간은 무섭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무고한 양민들의 울부짖음이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5. 마을 재건


4.3으로 인해 동광리를 이루던 5개의 자연부락은 거의 전소되다시피 하였고 가축들조차 보이지 않는 마을로 남아 있었다.

1956년경부터는 4.3 진압 과정에서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당시 10여 가구가 살던 간장동을 중심으로 마을 재건이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을 하여왔다.


다른 마을들은 아직까지도 잃어버린 마을로 불려지며 아픈 역사를 잊지않으려는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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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혼자서도 꽃인 너에게

    

            - 나 태 주 -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보다

두셋이서 피어 있는 꽃이

도란도란 더 의초로울 때 있다


두셋이서 피어 있는 꽃보다

오직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이

더 당당하고 아름다울 때 있다.


너 오늘 혼자 외롭게 

꽃으로 서 있음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라.



오늘은 혼자인 날

다른날은 오름회 멤버들과 함께 다녔는데

오늘만은 웬지 그냥 카메라 들고

누구도 신경 안쓰고 혼자 걷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백약이오름"


백약이 오름은 금백조로 길가에 주차하면

바로 등산로 입구여서 찾기도 쉽고

평일날도 등반하는 사람들이 꾸준해서

무섭거나 사고 위험이 없는 

혼자서도 안전하게 오를수 있는 오름이다


높이는 132m로 그다지 높지 않고

1 시간 정도 소요되며 가볍게 걷기에 좋다



오름 입구 무우밭에 무우들이?

제주도에서만 재배하는 월동무이다


올해 월동무 생산량 증가로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추세라서

농가들이 자발적으로 폐기 중이라고..


그렇다면 저 무우들 주워와도 된다는?



필요 이상으로 잘 정비된 산책로엔

내려오는 사람들과 오르는 사람들이..



반쯤 올라서 뒤를 돌아보니

살짝 굽은 도로와 멀리 바람개비가

약간은 뿌연 연무 속에 드러나고


아직은 훨씬 더 넓은 곶자왈이라는

대자연이 숨쉬고 있음에 안도한다.



강아지는 항상 주인보다 앞서 갔다가

돌아오고 다시 앞서 가기를 반복한다



분화구 등성이는 운동장처럼 넓게 펼쳐져

잔디가 곱게 깔려져 있고

사면 기슭에는 삼나무 숲이 둘러쳐 있다.


내측 사면 곳곳에는 여러가지

약용식물 들이 자라고 있다.

예부터 오름에 자생하는 약초의 종류가

백가지가 넘는다하여

백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여럿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꽃보다



둘이서 피어 있는 꽃이

도란도란 더 의초로울 때 있다고?


나태주 님의 얘기가 맞는거 같다.



분화구도 한바퀴 둘러 봐야지...



앞서 걷는 두 중년의 남녀는 부부...이겠지?

아마도...

약간 떨어져서 걷는거 보니까

부부가 확실해



분화구 한바퀴 다 돌고서

뒤돌아보니 오름의 군상들이 아름답다.


정상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없어

세찬 바람때문에 옷이 두터워도 춥고

카메라를 든 손은 마비된 듯 감각이 없다


이제는 그만 내려가야지...



오를 때나 내려갈 때나

항상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혼자인 사람도 꽤 보였는데

그 중에 남자는 나뿐이었네?


혼자 여행중인 여성분들은

안전하게 트래킹할 수 있고

동서남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백약이오름 적극 추천해요


오늘의 솔로트래킹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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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두번째 이야기 - 평화협상에서 초토화까지


첫번째 이야기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4.3 봉기까지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군정이 시작되고 일제에 부역하던 기존 경찰과 관료는 재등용되고 서북청년회의 만행등으로 도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3.1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3.10 총파업이 발생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무차별 연행과 고문으로 제주 사회는 분노 그자체, 결국은 이에 항거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남로당을 주축으로 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하게 된다.


해방부터 4.3봉기까지 역사적배경 다시보기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4.3 봉기가 일어난 후 제주도 경비대와 무장대와의 평화협정이 극적으로 타결되었으나 강경진압으로 돌아서게된 과정과 해안선 5km 이상 소개령 등 초토화 작전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평화협상 주도한 9연대장 김익렬 중령


▲ 1948년 5월5일 진압대책을 논하기 위해 제주에 모인 군경 최고 수뇌부  

- 왼쪽 두번째 미군정장관 딘장군, 맨우측은 김익렬연대장, 그 옆이 조병옥경무부장


ㅇ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주도가 道로 승격되면서 향토연대인 조선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1946년 11월 모슬포에서 창설되었다.

다음해 3월부터 제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전라도 청년들을 대상으로 모병하여 4.3 직전에는 인원이 800명에 달하였다.

초대 연대장에는 장창국 부위가 발령되고 1947년 9월 김익렬 부연대장(소령)이 부임하여 1948년 2월에 연대장(중령)으로 승진하였다.


ㅇ평화협정 체결 그러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인 김익렬 중령은 군대는 외적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하는 곳이지 치안문제에 관여하는 기관이 아니라며 처음에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딘 미군정장관은 4월17일 "항복을 유도하라"며 명령을 내려 4월28일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인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다.

4.28 평화협정 주요내용

① 72시간 이내 전투 중지 ② 약속위반시 즉각 전투 재개 ③ 무장해재 및 하산 후 신변보장


2.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 결렬


ㅇ방화사건 전모

오라리에는 4.3봉기 이후 무장대와 경찰로부터 각각 죽임을 당하는 인명사건이 몇차례 발생했다.

사건 당일인 5월 1일 오전 9시에는 전날 무장대로부터 살해된 대청단원의 부인의 장례식에 경찰과 서청.대청단원 30여명이 참석하였다. 장례식에서 나온 후 경찰은 돌아가고 청년단원들은 남아 오라리 마을에 진입하여 좌파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5가구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이들이 마을을 벗어날 즈음 무장대 20여명이 방화를 저지른 청년들을 추격하고 이 소식을 접한 경찰 트럭 2대가 출현했을때 무장대는 마을을 이미 떠나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불붙은 마을을 진화하고 있었는데 경찰들이 마을 어귀서부터 총을 쏘며 진격해오며 이 와중에 마을주민 고무생이란 여인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ㅇ제주도 메이데이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은 미군이 공중과 지상에서 입체 촬영한 소위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기록 영화에 생생히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발적 사건이라면 미리 준비해 놓듯이 이렇게 생생하게 입체촬영이 가능했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미묘하고 복잡한 사건이 뒤얽혀 일어난 오라리 연미마을 방화사건은 제주 4.3사건 전개 과정에서 미군정 당국이 강경진압 작전을 전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 제주도 메이데이 영상 - 항공에서 촬영한 불타는 오라리 마을


3. 김익렬 중령의 해임과 5.10선거 보이콧


ㅇ김익렬 중령 전출

오라리 방화사건을 조사한 제9연대는 보수 청년단체의 소행이라는 조사결과를 보고하였으나 미군은 경찰의 보고와 다르다며 이를 묵살하고 강경진압 명령을 내린다.

5월5일 군경수뇌부 9명이 모인 진압대책 비밀회의에서 김익렬 중령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사태 원인 및 해결책을 놓고 대립을 하다 몸싸움까지 벌이게 된다.

이를 계기로 5월 6일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중령을 전격 해임하고 9연대장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을 임명한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을 계획된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한 반면 김익렬 중령은 입산자들이 늘어난 것은 경찰의 실책때문이며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고 무력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조병옥과 몸싸움.


ㅇ제주도는 5.10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

무장대는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냈다.

선거 당일 마을에는 경찰가족이나 우익 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소수를 제외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산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나서야 마을로 돌아왔다

1948년 5월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선거 결과 유일하게 제주도에서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2개 선거구에서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2개 선거구에 대해 재투표를 명했으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재선거가 무기한 연기되고 제주도는 5.10 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 투표를 거부해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 


4.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


ㅇ미군 토벌작전 진두 지휘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 선거가 무산되자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통솔토록 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며 강경 진압작전을 본격화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ㅇ박진경 연대장 피살

김익렬 중령의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작전을 벌여 6주간 4,000명을 체포하며 이에 대해 미군정은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하며 제주에 부임한지 한달 남짓한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킨다.

그러나 1948년 6월 18일 진급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의 총에 맞아 피살된다.

이 암살 사건에 연루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다.


ㅇ무차별 학살극 초토화작전 감행

9연대장으로 새로 부임한 송요찬은 1948년 10월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km이외의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11월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작전이 본격화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제주 4.3 사건등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라" 명령했을뿐만 아니라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였고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켰다.


▲ 이승만대통령의 계엄문서


이렇게 하여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중산간마을에 토벌대가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림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이 자행된다.


세번째 이야기부터는 초토화작전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현장을 찾아 그날의 참상들을 조사하고 기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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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은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있으며

비고가 160m로 가파르게 경사지고

북향으로 말굽진 분화구가 있는 오름이다.

원뿔 모양의 동쪽 봉우리가 주봉이며

북쪽에서 보면 두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맑은 날이었지만 바람도 있었고

꽤나 차가운 겨울날에 지미봉을 올랐다.

파릇파릇한 무우밭 너머 지미봉이 보인다


오름 입구에 도착

지미오름에 대한 안내문을 한번 읽어본다.

지미오름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다.


중간쯤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남쪽 방향 전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멀리 한라산과 여러 오름들이 펼쳐져 있다.

맨 오른쪽에 크게 보이는 오름이

다랑쉬오름(월랑봉)인거 같다.


말미오름(두산봉)이 가까운 곳에 내려 보인다.


말미오름은 이중화산이다.

화산활동이 한번 생기고 이후에 다시한번

화산폭발로 인해 분화구 내에

알오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외각에 절벽처럼

동그랗게 둘러진 것을 응회환이라고 한다.

이런 형태의 오름은 제주에 3 곳이 있는데

말미오름과 우도봉, 송악산이 그렇다.


이 곳에 올라서 내려다 보니까

응회환의 형태를 확실히 볼수 있었다.


말미오름은 올레 1코스가 시자되는 곳이고

지미봉은 올레의 끝 21코스이다


아마도 올레코스를 결정할 때

머리에 있는 산(두산봉)을 1코스로 잡고

땅의 꼬리에 해당하는 오름(지미봉)을

마지막 코스인 21코스로 잡았는가 보다.


정상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새해에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이 많아

성산일출봉은 너무 혼잡하다.

그래서 요즘은 이 곳 지미봉에서

일출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그리고 내륙에는

종달리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옛날 염전으로 사용하던 지역이었는데

1957년부터 1969까지 근간 12년간

간척사업으로 넓은 평야가 되었다.

그 시대에는 식량 증산 정책으로

쌀을 생산하는 논 지역이었다가

현재는 밭으로 전환 또는 

타용도로 개발된 곳도 많다.


사진 중간에서 약간 우측 상단에

유수지가 보이는데 바다와 경계를 

가르고 있는 것이 도로 겸 방조제이며

그 곳에 가보면 배수갑문이 보일 것이다.


서쪽으로 내려다 보면

하도 철새도래지가 에머럴드 빛으로 보인다.

저 곳에는 겨울이 되면 겨울 철새인

저어새,도요새,청둥오리 등이 겨울을 난다.

조류독감이 발생하면 전면 출입 금지이다.


그리고 좌측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상당한 양의 용천수가 나오는데

그 곳에 하도 양수장이 있어

종달리 평야부에 농업용수를 공급했었다.

지금은 논이 없어짐에 따라 

양수장도 자연히 용도폐기 되었다.


올라갈 때와 반대 방향으로 내려왔다.


작년 여름 가뭄이 심했는데도

당근이 파릇파릇 잘 자랐다.


이 지역은 주로 당근과 월동무를 재배한다.

제주도 당근은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만큼 주된 소득원이다.


빈 밭에 당근이 몇개 남겨져 있다.

당근 빛깔과 잎파리를 보니까

수확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월동무우 밭인데...

근데 무우꽃은 하얀색으로 알고 있는데..

노란꽃은 유채꽃인가요, 무우꽃인가요?

누가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네요..


지나다 보니까 강황을 재배하는 밭이?

궁굼해서 밭으로 들어가 본다.

강황은 가루를 내어 카레를 만드는 작물이다.


밭을 이쁘게 꾸며 놓으셨다.

각종 야채와 동백꽃도 이쁘게 심으셨다.

이곳에 귀촌한지 7년 되셨다고 한다.


붉은 동백꽃은 덤으로....


이제 해안도로로 나왔다.

우도가 금방 닿을 듯 가깝게 보이고

바다 빛깔이 에머럴드처럼 이쁘다.


이 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고망난 돌불턱"이라 부른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작업중 휴식을 하는 곳이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저곳에 들어가면

한기를 느낄만큼 시원하다고 한다.


햇살이 물결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이날따라 바다 빛갈이 너무 이뻣다.


머리카락이 흩날릴정도로 바람이 불고

공기가 제법 차가운 겨울날이었지만

저 바다속은 따스할 것같은 느낌이다.


철새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찾고 있다.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봤는데

도요새인걸로 보이는데 맞나 몰라..



햇살이 물결 위에 눈처럼 쌓이고

쌓인 눈 녹여 품으려

물살 살랑이며 휘젓는데


바다는 스며들지 않는 비단인가

빛으로 반사되어 눈가를 자극한다.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어두운 것은 모두 가리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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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첫번째 이야기 - 역사적 배경


▲ 1948년 10월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 중산간 마을은 불타고 주민들은 해안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한다. 이는 4.3 피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민 25,000~30,000명이 희생된 제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8만명)

이 사건은 그동안 언급을 금기시하다가 1990년대에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2000년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4.3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정치,사회 시대적 상황을 먼저 이해하여야만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부터 4.3이 종료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몇 편으로 나누어서 이 곳에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당시 현장을 직접 찾아가 현재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지도 함께 기록에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에서 정의


1. 해방과 인민위원회 설립


ㅇ인민위원회 설립

36년간의 일제 통치에서 해방되자 여운형 등이 주도하여 우리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설립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어 치안유지와 건국할동에 매진한다.

1945년 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가 결성되고 이 조직들은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된다.


ㅇ제주도 인민위원회 결성

제주도의 건준지부는 1945년 9월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성되었다 초기에는 미군정과 협력하며 읍.면.리 단위까지 도 전체 조직으로 커졌고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했다.

항일투쟁 활동가들이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친일세력을 제외한 좌우익 모두가 참여해 세력이 강했으면서도 온건한 정책을 추구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 제주도 인민위원회 옛터로 중앙로 중심가 사거리에 위치해 있고 현재는 천년타워 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2. 신탁통치와 친일 경찰 재등용


ㅇ미군정과 친일 경찰.관료 재등용

11월9일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상륙하여 군정업무를 추진하면서 초기에 역점을 두었던 분야는 치안유지와 재산관리였다.

그런데 일제 식민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과 관리를 재등용해 민심을 자극하였다.


ㅇ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지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부 장관이 만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나라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였는데 최고 5년간 미국,영국,소련,중국이 신탁통지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자주독립을 갈망하던 우리국민들은 좌와 우를 막론하여 거세게 반발하였다.


3. 4.3의 도화선 3.1 발포사건 발발


ㅇ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대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길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주도 민전은 자주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1947년 3.1일 대대적인 3.1절 기념대회를 개최하였다.

기념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대략 25천~3만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제28회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던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민중가수 최상돈님이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며 해방의 노래 "만세"를 부르고 있다.


ㅇ가두시위와 경찰의 발포

기념대회가 끝난 후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다.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날 즈음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말굽에 치인 어린이를 그대로 둔채 가버리자 주변 사람들이 야유를 하며 돌멩이를 던지고 기마경관을 쫓아 갔다.

군중에 쫓긴 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는데 그 순간 총성이 울린다.

이 발포로 인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총상을 입고 이 사건은 이후 제주에 엄청난 희생을 몰고온 4.3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 당시의 기마경찰 - 일제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이 미군정에 의해 재등용되어 제주도민들의 원성을 샀다.


ㅇ3.10 총파업으로 항의

경찰 발포에 항의하여 1947년 3월10일부터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은 제주도청으로부터 시작해 각 관공서 및 금융기관, 학교로까지 번졌고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 66명까지 파업에 동참하여 166개 기관, 41,211명이 파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4.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무차별 연행


ㅇ미군정의 조사단 파견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여 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은 남로당 제주 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 또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했다.

거기다가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한다


ㅇ응원 경찰 급파와 대대적 검거

조사가 끝난 후 3월14일 조병옥 경무부장과 경찰 421명이 급파되었다.(당시 제주경찰은 330명)

조병옥은 15일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려 이틀새 200명이 연행되고 이들에 대한 고문이 시작된다,

3.1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가 2,500명에 이른다.



5. 극우청년단 "서청" 제주에 들어오다


ㅇ서북청년회란

북한에서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청년단체로 미군정은 서청의 극우적 성향을 이용해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지역에 이들을 투입했는데 봉급없는 경찰 보조기능을 하면서 갈취와 폭행을 일삼아 주민들로 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


▲ 서북청년회 집회


ㅇ빨갱이 척결을 구실로 갖은 만행 

제주도가 붉은섬으로 지목되면서 서청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행정기관,교육기관등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초에는 서청단원이 760명에 이르렀고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미명 아래 주민들을 연행하고 고문하여 제주를 공포와 분노의 소용돌이로 몰고가 민심을 자극시켰으며 결국 이들의 악행도 4.3사건이 발생하게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는 1947년 11월2일 조일구락부에서 결성되었다 - 중앙로 사거리에서 칠성로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 칠성로 내 제주신보사 옛터로 ROGATIS 뒷편 초록색 양철로 만든 제주신보사 옛 건물의 형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제주신보는 해방이후 제주도의 유일한 언론매체로 4.3발발 이후 제주읍내에 배포된 전단지가 빌미되어 서청단원들이 사장과 편집국장 등에게 집단폭행을 가하고 제주신보사를 강제 접수하여 7개월간 변칙 발행했다. 이후 편집국장 김호진은 군수사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1948년 10월에 처형되었다. 1990년 "제주신보"의 일부가 발굴되어 4.3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하였다.


6. "탄압이면 항쟁" 무장봉기 발발


ㅇ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다

1948년4월3일 새벽 2시경 오름 정상에 붉게 타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하여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와 경찰, 서북청년회 단원의 숙소를 등을 공격하는 무장봉기가 벌어졌다.


ㅇ봉기의 명분

무장대는 봉기의 명분으로 크게 두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는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저항과 둘째는 5.10 총선거를 한달정도 남겨둔 시점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에 반대해 조국의 통일 독립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ㅇ무장대의 실체

무장대는 초기 350명이었고 4.3 전 기간을 통틀어도 500명을 넘지 못했다.

4.3 봉기 당시 무장대가 소유한 무기는 일제 99식 총 27정과 권총 3정, 수류탄 25발이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토벌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으나 토벌대는 진압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하였고 또한 무장대는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 중국 팔로군 출신이며 심지어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언론에 왜곡 발언을 하였다.


이상으로 해방 이후부터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발생하기 까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았다.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평화적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과 강경 진압하기 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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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때 제주에서는

춘향이보다 더 애절하고 목숨을 던져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낸

홍랑 홍윤애의 이야기가 있다.


오늘 그 홍윤애의 묘터를 찾아

가슴시린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먼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홍윤애와 조정철에 대해서 알고 가자.


조정철과 홍윤애는 누구?


조정철은 조선 명문가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이고

장인은 노론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였다.


장인이 정조시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조정철은 27세에 제주로 유배를 오게되고


부인 홍씨는 친정아버지로 인해 남편까지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된 자책감에 

자결을 하게된다.


홍랑 홍윤애는 고려말 정승을 지낸

홍언박의 후예이나 15세기 초 제주에 유배온 

홍윤강의 후손이다

몰락한 유망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


조정철은 정조 1년(1777년) 제주에 유배와서

외부와 일체 단절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고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 조정철의 인품을 흠모하던 홍윤애는

조정철의 처지가 안타까워 식사장만과

빨래 등 심부름을 자처하게 된다.


둘의 관계는 동경과 존중

그리고 은혜와 감사의 마음으로 맺어졌다.


이후 그들은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사무쳐

연인으로 발전하여 정조 5년(1781년) 2월

마침내 홍랑은 귀여운 딸을 분만하게 된다.


새로 부임한 목사는 집안의 철천지 원수


노론 4대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소론파 김시구

그가 제주 목사로 부임했다.


홍랑이 딸을 분만한지 한달 후이다.


김시구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철을 제거할 뜻으로 그의 죄상을 조사한다.


주변을 염탐하던 중 홍랑이 그의 적소를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를 관아로 잡아들인다.


목사가 근무했던 제주목관아의 현재 모습


고문, 그리고 죽음. 사랑을 지켜내다


김시구는 홍랑을 동헌 뜰 형틀에 묶어

조정철의 죄상을 자백 받아내기 위해

참혹한 고문을 가한다.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은 산모 홍랑은

곤장 70대를 맞고 살과 근육이 찢겨지고


출산후 자리잡지 못한 뼈는 몸속에서

우스러지니 세상의 어떤 고통이

이보다 더 하리오.


결국 홍랑은 형틀에 묶인 채

그렇게..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과 딸, 그리고 세상과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어사 파견과 진상조사


김시구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을

은폐하기 위해 도내에서 유배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어사 박천형을 내려보내어

조사하지만 아무런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시구는 파직되고

조정철은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 정의현과 추자도 등으로

이배되어 55세 까지 29년간

긴 귀향생활이 이어진다.


관직 복귀와 한 맺힌 제주 목사에 부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조정철은 1805년 귀양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재 등용된지 7년 만인

순조 11년(1811)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홍윤애의 무덤 앞에서 절절한 시 한편


제주 목사로 부임 후 조정철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홍랑의 무덤을 찾았고

그의 딸도 해후하였다.


그는 홍윤애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그녀에게 바치는 애절한 시를 새겨놓는다



옥 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지 몇해인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하여 돌아갔을까


진한 피 고이 간직하니

죽더라도 인연으로 남으리


전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고


일문에 높은 절기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한 떨기 꽃

글론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홍윤애의 무덤은 원래 지금의 전농로에 

있었으며 무덤터 푯말은 현재 전농로 LH공사

건너편 보도에 설치되어 있다.



무덤터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을 홍랑길이라

이름지어 그녀를 기리고 있다.



홍윤애 무덤은 1936년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되었다.


앞에 보이는 묘가 홍윤애의 묘이고

뒤에는 홍윤애의 외손자 박규팔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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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오랜만의 포스팅이다.

유난히도 춥고 길었던 겨울의 뒷자락

2월 마지막 주말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단산을 올랐다.


박쥐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을 하고 있다.

제주의 오름은 대부분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어 여성적이다.

하지만 이 곳 단산은 뽀족한 모습을 하고 있어 거칠고 남성적이다.

그래서 제주 오름의 "이단아"라 부른다.


단산은 바굼지오름이라고도 한다.

"바굼지"는 바구니를 일컽는 제주어이다.

옛날 제주 들녘이 물에 잠겼을 때 바굼지만큼 물위로 보였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단산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보인다.

1132번 일주도로를 따라 가다 차를 세워서 보면 5개의 봉우리가 모두 보이는 곳도 있다.


북쪽 사면은 깍아지른 듯 직각에 가까운 절벽이다.


남쪽 사면에는 다소 가파른 경사에 소나무와 보리수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나마 완만한 편인 서쪽 사면 단산사가 있는 곳으로 올랐다.

물론 데크 계단으로 편하게 오를수 있는 등산로도 마련되어 있다.


비가 오는 날엔 가급적 이쪽 방향으로 안오르는게 좋겠다.

그리고 애들과 함께 오기도 좀 위험해 보인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는 모슬봉이다.

아래 보이는 평야부는 정리가 잘 되어있는 밭 지역이다.

이 지역은 양배추와 브로컬리, 마늘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경치에 취해 있을수 없다.

조금만 더 오르면 경치를 맘껏 느낄수 있으리라.


두 봉우리 사이로 산방산이 쑤욱~


대나무 사잇길도 뚫고 걸어야하고


정상?

일단 이 곳에서 휴식

약간 해무가 약간 끼어 있어 아쉽다.

형제섬, 송악산, 가파도, 마라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사방 천지가 모두 내 발아래 있도다.

요기 바로 밑이 아까 깍아지른듯 보이던 북쪽 사면이다.


걸을때는 몰랐는데 사진으로 보니까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오래돼서 무슨 열매인지 잊어버렸다.


맨 동쪽 암봉은 "칼날바위" 또는 "칼코쟁이"로 불릴 정도로 험해 오르기가 쉽지 않다.


그냥 여기까지만 올라 기념 샷!


남사면쪽을 옆에서 찍어 본다.

소나무와 보리수 나무들이 무성하게 나 있다.


아쉬운 맘에 내려왔던 길을 한번 바라본다.


동남쪽 방향으로 내려왔는데 소요시간은 약 1시간 30분..

오늘도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며 걸을수 있음에 감사하며 점심식사와 막걸리 한잔 하러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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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봥옵써

제주의 밭담은 2014년 FAO에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믄 농업방식이다

제주연구원에서는 제주밭담을 보존하고 이를 활용하여 농촌의 문화,환경을 체험하고 지역 홍보와 6차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밭담길을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번 구좌읍 월정리 진빌레 밭담길에 이어 2번째 밭담 투어를 해본다.


진빌레 밭담길 체험담 보러가기


평대리는 최근에 해안도로변에 유명맛집과 커피숍이 많아지면서 방문객이 급증하고 있다.

번잡함과 상업주의에 물들어 인간다움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정감이 도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감수굴 밭담길을 걸으며 그 정감을 몸소 느껴보기로 하겠다.

소요시간은 30분으로 다소 짧지만 주변 맛집에서 식사하고 산책 삼아 천천히 걸으면 좋을것 같다.


마을 안길에도 밭작물이 파릇하다.

평대리는 주로 당근과 무우를 많이 재배한다.


밭담 틈새로 밭일하는 아낙들이 보인다.

밭담은 서로 꽉 물려있으면서도 이와같은 틈새공간으로 인해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아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최근 시집을 하나 선물받았는데 그 시집속에 제주돌담이란 시가 있다.

돌담의 특징을 시적 운율로 표현해 준 시이다.


         제주 돌담

.                       /시인 오시열


온몸에 구멍 숭숭 내 놓고도

제 살 눌려 찢기면서도

비비고 껴안는

바람 비켜갈 자리 마련해 놓는....


스님? 처럼 보이지만 이 지역 지도자 분이시다.

평대리는 농식품부에서 지원하는 창조적마을만들기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주민의 주도로 시행하는 상향식 사업이다.

그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추진위원장님이시다.

위원장님께서 이 지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평대리 중동마을에는 혹할아버지좀좀할아버지가 사셨다.

두분 할아버지는 매일 같이 중동마을 어귀에 나와 계셨다.


동네를 시끄럽게 다니면 혹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발을 구르며 "혹"하고 소리쳤다.

아마도 새를 쫒을때 "훠이"와 같은 의미인듯..

그러면 좀좀할아버지는 "좀좀허라"라고 하신다.

"좀좀" "조용히"라는 제주어이다.


좀좀할아버지는 항상 동전을 여러개 주머니에 갖고 다니셨다.

동네의 어린이들이나 착한 학생들을 보면 동전을 하나씩 주시곤 하셨다고 한다.


두분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은 이 동네에 술취해 떠드는 사람도 없고 싸움도 없었다고 한다.

위 사진의 집은 혹할아버지가 살던 집으로 지금은 비어있다.

자녀분들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는 하는데 왜 지금까지 빈집으로 남겨놨는지는 못물어봤다.


위원장님은 가끔 두분 할아버지 집에 막걸리 받아놓고 인사 드리러 갔었다는데 지금도 두분 할아버지가 생각이 난다고 한다.


올레의 원래 뜻은 집과 동네 큰길을 이어주는 집앞의 좁은 길을 말한다.

지금 보는 길이 진정한 의미의 올레이다.


제주의 돌은 밭담뿐만 아니라 집을 지을때도 사용하였다.

돌과 찰흙을 이용하여 지었는데 위에 보이는 집은 돌과 시멘트를 이용하여 지은 집인것 같다.


감수굴 밭담길은 바다보다는 마을안의 밭담길을 위주로 만들어져 있다.


바다는 잠깐 스쳐지나고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본다.


걷다가 뒤들 돌아보니 스레트 집들이..

예전에는 전부 초가집이었을텐데...


이 곳이 감수굴이다.

조선 숙종 때 모래땅에서 샘물을 처음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물맛이 워낙 좋아 감수라 하였고 관혼상례시 정한수로 귀하게 쓰였다고 한다.


어느덧 감수굴 밭담길 투어는 끝나가고...

저 나무 있는 곳이 혹할아버지와 좀좀할아버지가 항상 머물던 곳이라 한다.

혹할아버지의 "혹"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 평대리는 해안도로를 중심으로 정말 많은 방문객이 찾아온다.

맛집마다 1~2시간 줄서는 것은 보통이고 커피숍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SNS에서 유명해진 맛집 탐방과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샷도 남길려고 많이 찾는것 같다.


가끔은 오늘처럼 정감이 감도는 마을 안길을 걸으며 사람 사는 시골향기를 느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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