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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즐기기/문화 관광지

이중섭 거리에서 - 비운의 천재화가

오늘 이중섭 거리를 찾았다. 


이중섭 작가가 서귀포에 산 기간은 1951년1월부터 12월까지이다.

1.4후퇴때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가족은 잠시 부산에 머문 후 제주도 서귀포에 도착한다.

△길 떠나는 가족

"길떠나는 가족"이라는 작품을 보면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정든 고향을 떠나는 모습이 마치 즐거운 소풍이라도 가듯이 흥겹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54년 작품으로 이 시기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그만큼 서귀포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던 기간이 그의 인생중에 가장 행복했던 기간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가 살았던 곳을 한번 보자.

주차장에 차를 세워 이 길을 따라 가면 그가 살았던 거주지가 나온다.

가는 길에 공원과 그의 동상이 있다.
그의 옆에 앉아 사진 찍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보인다.

그가 살던 집이다.

1.4평 되는이 곳에서 그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이 함께 살았다.
이후 12월에 부산으로 갔다가 생활고로 이듬해인 1952년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부두노동등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간다.
1955년 미도파화랑, 대구 미국공보원 등에서 개인전을 여는등 작품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이중섭의 예술혼을 기리고 제주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1996년 이중섭거리가 지정되고 2002년 이중섭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으로 미술관 관리를 위한 최소한의 요금만 받고있다.

내부에 그림과 액자를 판매하고 있다.
전시실 내부는 촬영금지로 포토존이 따로 있었다.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흰소"는 1954년 작품으로 마치 살아있는 소가 거친숨을 내쉬며 분노하듯 생동감을 준다.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나타낸듯 하다.

교과서에도 나온다는 대표작 "황소"
황소가 붉은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순간을 그린 작품으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황소의 애절한 눈빛에서 보여준다.
1952년 일본으로 떠난 후 이듬해 한차례 일본에 다녀온후 만나지 못하고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다 1955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다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는날까지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했는지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낸 것이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대표적인 작품은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현재의 섶섬의 모습이다.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결코 시인이 아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시로써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그의 인생 자체이자 그의 작품마다 이런 그의 이런 철학이 묻어난다.

그의 인생에 대해 쓰다보니 괜히 내맘도 서글퍼지는 거 같다.
환한 밖으로 나서보자.

거리 쾌청~
제트비행기가 지나갔는지 1자 구름이..

4.9km에 이르는 작가의 산책길 안내이다.

다 걷고 싶지만 시간관계상 이중섭거리 풍경만 감상하자.


"중섭거리 중섭식당에는 중섭이 없다.

중섭이 닮아가는 태중이 형이 세월을 팔고 있다."

중섭식당 간판 옆에 붙여진 글이다.

트멍공방과 중섭공방 모습

폰케이스와 반지 팔찌, 목걸이 등 다양한 작품들을 팔고 있다.


거리에 앉아 쉬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야외 전시장


한라봉쥬스 등을 파는 카페 분위기도 묘하다.


맨 앞에서 봤던 "길 떠나는 가족"을 조형물화 하였다.


서귀포극장은 서귀포 시민들에게 문화예술의 향유지였다.

학예회 발표부터 다양한 공연과 영화상영의 공간이었다.


오늘은 우리나라 고난의 시대에 불행하게 살다간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작가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된 하루였다.

그의 시 "소의 말"을 읊으며 오늘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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